생각을 찍다 가을 나들이 나선 할매들이 늙은 회화나무 앞에서까르르 소녀처럼 웃으며 사진 찍는다이빨 시리지 않은지 아이스크림 하나씩 입에 물고있는 힘껏 허리 펴고몇 백 년을 산 나무그늘 속에서그녀들 아직 어린아이다그러고 보면 몸이란 생각이란 그늘에 묻혀혼자 늙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속살까지 온통 시멘트로 땜질한 채, 살아남기 위해늙어가는 것마저 저당 잡힌 나무보다야옥죄인 생의 매듭을 스르르 풀듯사진기를 들이대면 웃음이 터지고 허리가 펴지는 순간그녀들의 연대기는 입에 문 아이스크림처럼달콤한 어느 곳에선가 다시 시작해도 좋겠다포즈가 바뀔
와카나이 港,11월과12월 사이오호츠크를 향해 끝없이 밀려가는 먹장구름은그곳의 오랜 관습이다.잠시 머문 잿빛하늘로부터그들 발자국 같은 젖은 눈이 내리면두꺼운 철갑 위를 멍울져 번지던 붉은 메꽃들꽃들에게 침식당한 늙은 게 잡이 배들은오라에 묶여 요동 없는 날이 길어진다. 그런 날,사람들은 뱃속에 산채로 버려져항구엔 가끔 싸구려 보드카나달러를 팔러오는 이들이 있긴 했지만며칠씩 눈이 내리는 동안굶주린 까마귀들과 좁은 배를 뛰쳐나온짖지 못하는 러시아 개들이 사람보다 많았다.그것은 고요한 슬픔 같은 것이어서낮도 밤같이 어둡고 적막하기만 했다
오릭스 호號에서의 일주일그해 겨울 러시아 선적 대게잡이 배에 조업감독관이 된 나는 수평선 보이지 않는 바다에 간적이 있었다. 가끔 사할린 반도 어디쯤인가 가물대던 12월 오호츠크, 일상이 가볍게 들려주던 공포란 정말 실없는 말들이었다. 일주일을 설탕물만 마셨는데 설탕물도 쓴맛이 난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한 이틀 죽을 것 같았고 그 공포가 사그라질 즈음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밤이면 바다 속 유령들이 선체를 뜯어먹던 소리 그 소리에 놀란 몸뚱인 관 짝 같은 침상 위를 떠올랐다 곤두박질치고 그럴 때면 지금은 이름도 가물한
긍정의 힘 바닷가 작은 마을 깨진 담벼락 아래아무렇게나 쌓인 돌무더기 속갓 자란 상추 한포기보며 반성한다상추만한 혓바닥으로 틈만 나면힘들어 죽겠다고 말한 것과고개 숙이면 지는 것이라고주눅들지 않기 위해 쏟아낸일그러진 말들에 대해순응을 거부하는 것이 돌무더기 같은 세상을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상처입지 않기 위해 조합해낸은유와 비유의 모든 문장들에 대해 반성한다사는 것에 손사래를 치듯 척박이란 말을 앞세워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부정했나옅은 바람에도 일렁이며 낮은 곳으로만푸르게 펼쳐지는 생, 끝내 저렇게 살아내는상추같은
막걸리 집 미자씨 막걸리 집 이름이다 천상막걸리 집을 위해 지어진 이름 같다낮은 스레트지붕, 흙 바른 천장, 자그마한 방들 그 방안에 녹아들어 취한 사내들그 집 툇마루에 걸터앉아건너편 작은 창고 양철지붕위로 탕탕- 떨어지는 설익은 땡감 소릴 듣다가아, 듣다가사는 게 얼마나 버거우면 저 푸르고 단단한 것들이 투신할까한때 많은 푸르름들이 저렇듯 사라져 갔지단단하였지만 단단함만으로 살 수 없어 세상에 그 단단함을 내 던졌던죄 많은 소문이 그들을 묻었고 그리고 잊혀져갔지그들의 푸른피를 수혈 받은 세상은 이렇듯 안녕한데오늘밤잘 익은 술에 취
슬픔의 起源 혼자 먹은 저녁상을 물리고한 개의 밥그릇과 국그릇을 씻고한 쌍의 수저도 씻어놓고혼자 잠들 자리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다가한순간 눈알이 뜨끈해진다미친듯이 차들이 내달리는 도로 위피투성인 채 축 늘어진 개 한 마리 입에 물고아슬하게 서 있는 또 다른 개 한 마리, 필사적이다두려움 없이 제 몸을 사지로 내몬 저 개오히려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함께 밥을 먹고 거리를 배회하고후미진 동네구석에서 눈치껏 사랑을 나누던곁이 사라진다는 것이 더 두려웠을 것이다비칠비칠 개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먹먹한 하중을 견디지 못
-연재를 시작하며이미 오래 전 절판된 첫 시집을 다시 꺼낸다. 서툰 마음으로 가득한 문장들. 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첫 시집을 알뜰히 묶어준 김충규 시인은 세상 밖의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더는 쇄를 찍지 못하고 절판 된지 여러 해다. 몸과 마음이 가장 서럽고 아플 때 쓰여 진 시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문학은 늘 그 시대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라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첫 시집은 그런 눈으로 바라본 세상과 사람과 사물에 대한 기록이다. 나는 단 몇 퍼센트의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세상은 늘
만큼 꽃 날리는 거리에서 당신을 생각해하염없이 날리는 저 꽃들만큼언제부턴가 내게 꽃이란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으로 날려가는 거지그것만이 내가 기약할 수 있는 일이지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던 바로 그 순간부터얼마만큼의 시간이란 이제 없는 말이지다만 당신과 내가 기약의 생으로아주 천천히 날려가는 것 일뿐좀더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 미안한 시간들이지당신죽어도 좋을 만큼 볕 좋은 봄날을 기억하는지그 ‘만큼’의 크기라는 것이 있다면아마 내가 당신을 사랑하다 죽어도 좋을 만큼이겠지이 계절 가슴속에 다 품어내지 못하는 萬化方暢이란내 온몸을 쿵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