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소나무를 만수지장(萬樹之長)이라 하여 모든 나무의 으뜸으로 꼽았고 오색지수(五色之首)라 하여 우리의 전통 5방색의 첫머리로 삼았다.사람은 소나무와 함께 태어나서 소나무와 함께 죽는다하여 소나무를 한민족의 나무라 하기도 한다. 아이가 태어날 때 소나무 가지를 꽂은 금줄을 쳤고 사람이 생을 마감하고 흙으로 돌아갈 때도 소나무 관(棺)의 신세를 진다.집
기성면 구산리 마을에서 평해읍 월송리쪽 끝자락에 한국전통 건축물로 깔끔하게 단장된 운암서원(雲巖書院)이 있다. 현재의 운암서원 건물은 서기 1964년에 세운 것으로 본래는 「조선 순조(純祖) 26년(1826년) 온정면 반암동에 창건하여 백암(白岩)김제(金濟) 와 물제(勿齊) 손순효(孫舜孝) 양현을 배향하다가 순조 33년 (1833년)에 온정면 노은동(魯隱洞
‘매향(埋香)’이란 향나무를 땅속에 묻어두는 것을 말하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발견된 것을 ‘침향(沈香)’ 또는 ‘침향목(沈香木)’이라 한다.매향을 하는 목적은 불교의 미륵신앙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으로, 요약하면 ‘부처가 중생들을 구제하고 난 뒤 56억년 후에 미륵이 하생하여
요즘 전국을 강타한 구제역이 거의 끝나 가는가 싶더니 청정지역이었던 울진에도 번졌다. 연일 살처분하는 소와 돼지들을 지켜보며 축산 농가들은 물론 모든 군민들이 불안에 치를 떨고 있다,울진군지 “災異” 편에 보면 괴질(怪疾)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물론 가축이 아닌 사람에 대한 온역(瘟疫)이지만 재앙이라는 점에서 무엇이 다르겠는가. 서기
불영계곡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근남면 행곡리 '쌀구'라는 마을이 있다. 본래는 '쌀구'가 아니라 '쌀이 나오는 창고'라 하여 '쌀고(米庫)'라 하였는데 그 유래가 재미있다. 이 마을의 서쪽 뒷산은 큰 바윗돌들이 벼랑을 이루고 있는데, 바윗돌 앞에 자그마한 암자가 하나 있었다. 바위산 벼랑 중간쯤에 돌로 축대를 쌓고 6~7평 정도의 평지를 만들어
기성면 방율리 감율마을에서 북쪽으로 '제정골'이라는 깊은 계곡이 있다. 폐교된 방율분교 뒤쪽의 개울줄기를 따라 2km쯤 올라가면 산 정상부근에 높이 7미터, 길이 20미터 정도에 웅장한 바위가 있어 사람들은 '장군바위'라 부른다. 이 바위는 남쪽으로는 절벽을 이루지만 북쪽으로는 사람이 올라갈 수 있으며 바위 위에는 대여섯 명이 앉을 수 있게 평평하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죄악에서 구하고 영원한 삶을 살게하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모든 인류는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음에 감사하여 성탄을 축하한다.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늘나라로 올 자가 없다”라고 말씀하셔서 영원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비밀은 예수를 믿
적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돌이나 흙으로 둑을 쌓은 것이 성(城)인데 성(城)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중국의 만리장성이다.중국의 성의 기원은 BC 2000년경이며 유럽인 영국의 메이든성도 이 시기에 쌓여졌고 서아시아에서는 이보다 빠른 메소포타미아의 초기왕조시대인 BC 3000년대 성이 만들어졌다고 한다.한국이 본격적으로 돌을 쌓아 성을 축조한 것은
불영사라 하면 울진군에서는 가장 오래된 사찰이자 제일 큰 절이다.불영사는 서기 651년 의상대사가 세운 사찰로 전해지고 있다. 이때 신라는 삼국통일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구려와 백제 변방의 영토를 하나씩 복속시키던 때였다.고구려와의 접경지대로 오랜 실랑이를 겪었던 울진지역은 이미 6세기 초에신라에 복속되어 신라 왕의 지배를 받았지만 고구려와의 접경지대에는
신울진원자력발전소 부지를 조금 지나 북쪽으로 고개마루를 올라가는 마을이 울진군 북면 신화리이다. 이 마을의 중간 언덕배기인 신화리 246번지선에는 자그마한 고인돌 1기가 있고 그 돌에는 지름 20cm정도의 원형 말발굽이 선명히 찍혀있는 일명 “말 발굽” 바위가 있다. 말발굽 바위에서 남쪽으로 200M정도 떨어진 신화리 마을 입구 하천가
기성면 구산리와 평해읍 월송리 경계지점 하천 부근에 아담한 비각이 하나있다. 이 비각 안에는 희뿌연 색깔의 석비 1기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석이「북천교비(北川橋碑)」이다. 커브길에 있다 보니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별 관심없이 지나치고 마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400년이나 된 매우 귀중한 비석이다.크기는 높이 187cm, 너비 64cm, 두께 18cm로 조
국가문화재인 명승 제6호로 지정된 불영계곡은 산태극 수태극 형국의 산곡으로 이루어져있어 한국판 “그랜드 캐넌”이라 할 만큼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하고 있다. 구불구불하게 패인 계곡을 어떤 이는 의상대사가 불영사를 창건할 당시 불영사 마당의 연못에 있던 독룡 9마리를 신력으로 쫒아내자 독룡들이 놀라 도망간 자리라고 우스개 얘기
대관령 동쪽을 관동지방이라 하며 동쪽 해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수없이 많은 절경들이 있는데 그 중 가장 경치가 빼어난 여덟 곳을 택하여 관동팔경이라 이름하였다. 관동팔경 중 2곳은 삼일포와 총석정으로 북한지역에 있고 나머지 6곳 중 2개소가 울진에 있다. 평해에 있는 월송정(越松亭)은 월송리(月松里)라는 마을 안에 있는 정자로 관동팔경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북면 두천1리 말래마을에는 효자 심천범과 효부 강릉최씨 부부의 효자비가 있다. 말래 마을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바릿재 입구 언덕 위에 있는 이 정려각은 부부의 효행을 함께 기리므로 ‘쌍효각’이라 부른다. 붉은색 바탕의 액자에는「孝子 贈童蒙敎官朝奉大夫沈天範. 孝婦贈令人江陵崔氏之閭」이라 적혀 있고, 비각 안에는 소박한 모양의 석비 1점이
유학의 근본이념은 효(孝)에서 출발한다. 효(孝) 열(烈,) 충(忠)은 가정과 국가를 지키는 근원이며 한민족의 아름다운 전통이자 풍속이다. 이러한 미풍양속을 권장하고, 덕행을 표창하며, 타인의 귀감이 되도록 하기위해 효자나. 충신, 열녀에게 나라에서 상을 내리고 그가 살고 있는 고을 입구에 비석을 세우거나 그 집 문 앞에 문을 만들어 세우는 것을 &lsqu
보통 사찰의 법당 앞에는 탑이 있는데 탑이 하나일 경우에는 부처와 일직선으로 세우고 쌍탑일 경우 좌우로 배치한다.탑의 기능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는 건조물로 '솔도파(率堵婆), 수두파(藪斗婆), 탑파(塔婆)'라고도 하였다. 탑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처음에는 사리를 넣지 않고 기념적 성격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사용하기도 하여 불교가 생기기 이전부터
5월 21일이 음력으로 4월 초파일, 석가탄일로 각 사찰마다 연등을 달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신을 축하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번뇌를 108가지로 보아 '백팔 번뇌'라고 하며 스님들이 108개로 만들어진 염주를 항상 목에 걸고 다니면서 번뇌의 소멸을 기원한다. 번뇌란 괴로워할 번(煩), 괴로워할 뇌(惱)자로 인간을 괴롭게 하는 근원이 108가지라는
없어진 옛 절터를 찾아다니다 보면 들판이나 논밭에 모양이 같은 두 개의 돌기둥이 서 있는 것을 간혹 볼 수 있다. 이것을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하는데, 마주 서 있는 돌기둥의 중간에 높은 장대를 세우고 여기에 깃발을 달았다. 이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요즘의 국기 게양대와 같이 연상하면 맞을 것 같다.돌로 깍아 대칭으로서 있는 지주는 당간을 높게 세우
불교에는 사람이 죽으면 극락이나 지옥이 있어 생전의 과오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심판에 앞서 지장보살이라는 판사 아래 열명의(十王) 대왕들이 있어 죄인들을 문초하고 7일마다 한번씩, 7번의 재판을 한다.49일 만에 마지막 재판이 열리며 죄인의 갈 곳이 정해진다. 착한 일을 많이 한 영혼은 윤회 환생하는 판결을 받기도 하지만, 죄업이 큰 자는 8번째의
며칠 전 지역 어느 신문에 울진군에서 후포리 등기산에 망사정( )을 복원해서 정자를 세운다는 기사가 있었다. 등기산은 고래가 물을 뿜고 갈매기 울음 속에 고깃배가 유유히 떠 나니는 절경 중의 절경으로 망사정을 복원하면 가히 볼만한 거리가 될 것이다. 현재 후포 등기산에는 고려 때 세웠다는 망사정은 없고 1982년에 세운 남호정(南湖亭)만 있는데 이 정자(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