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는 조선시대 공립교육기관이다. 성균관(成均館)이 최고의 국립대학이라면 향교는 지방의 중, 고등학교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울진군에는 조선 성종 때인 1484년부터 시작된 울진향교가 있고 고려 공민왕 때인 1357년부터 시작된 평해향교가 있다. 우리나라의 공공 전통 건축물에는 대부분 아름답고 화려한 색채로 채색되어 있는데 향교 건물은 대체로 간단하게 채색
울진군지의 총담편에 조선시대 의병장인 '곽재우' 장군이 원남면 금매리 장정동에 은거하였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계모 허씨가 창녕군 화왕산성에서 병으로 사망하자 일시적으로 정란(政亂)을 피하여 울진으로 오게 되었다. 원남면 금매리 장정동 방어사곡에 체재하게 된 후로는 두문불출하고 자제를 거느리고 당시 서민들의 일반 립(笠)인 폐양자(蔽陽子)를 제
고려 충정왕(忠定王)때 동해안을 유람하던 『가정 이곡 稼亭 李穀』 선생이 울진을 방문하여 성류굴을 찾았다. 당시 그가 보았던 성류굴의 모습은 어땟을까?가정(稼亭) 이곡(李穀, 1293~1351)선생은 고려말 학자로 충렬왕 말기에 태어나 충선왕ㆍ충숙왕ㆍ충혜왕ㆍ충목왕ㆍ충정왕까지 14세기의 충신이었다.고려말 삼은(三隱) 가운데 한 분으로 유명한 목은 이색(牧隱
평해 월송정에 기우자 선생의 시가 게판되어 있다.「평해 월송정 平海越松亭」「滄溟白月半浮松 (창명백월 반부송) 동해의 밝은 달이 소나무에 걸려있다叩角歸來興轉濃 (고각귀래 흥전농) 소를 타고 돌아오니 흥이 더욱 깊구나吟罷亭中仍醉倒 (음파정중 잉취도) 詩 읊다가 취하여 정자에 누웠더니丹丘仙侶蒙相逢」(단구선려 몽상봉) 丹丘의 신선들이 꿈속에서 반기네 기우자(騎牛子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 가면 “주천대”가 있다.이곳은 만휴당 임유후 선생이 울진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개화의 현장으로 본래는 “수천대(水泉臺)” 였으나 만휴당의 제의로 “주천대(酒泉臺)”로 변하였다.선생은(1600~1673) 풍천임씨로 諱(휘)는 만휴(萬休), 字는 효백(孝伯), 號(호)
원남면 갈면리 동막 마을에서 영양으로 넘어가는데는 고초령(高草嶺)이라는 큰 재를 넘어가야한다.이 고초령은 일명 “높을재”라고 부르는데 예부터 “등금쟁이”들이 행상을 다니던 길이었고 1960년대 까지도 “도부꾼”들이 다니던 길이었다. 도부꾼이라면 해안에서 생산되는 오징어 미역 소금등 해산물을 가
추석을 며칠 앞둔 9월30일 울진 출신 주호영 국회의원이 49세의 나이에 특임장관 임명장을 받았다. 주씨(朱氏)문중에서 마련한 장관 취임 축하연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축하와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조선 5백년 동안 왕의 측근에서 봉직한 울진인들은 불과 몇 분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번 주호영 장관 임명은 울진으로서는 엄청난 경사가 아닐 수 없다. 1392년
훌러덩 벗고 바닷물을 찾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추석이다. 추석은 음력 8월15일로 우리나라 4대 명절중 대표적 명절로 중추절(仲秋節), 한가위, 가배일(嘉俳日)이라고도 하며,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옛말대로 춥지도 덥지도 않은 청명한 기후에다 햇곡식과 햇과일이 미각을 돋우니 그래서 청명가절(淸明佳節)이라고도 한다.추석의 기원이나 유래에 대해서는 정
기성면 구산리에서 봉산리 해안쪽으로 해안도로 따라 가노라면 구산리가 끝나는 지점쯤의 길 옆 암벽위에 오석으로 새겨넣은 비석 1기를 볼 수 있다,이 비문은 '백암(白巖) 김제(金濟)' 선생이 불사이군의 충정을 담은 마지막 절규이다.선생의 호는 백암이요, 이름은 제이다. 그는 고려말 충신으로 본래 선산출신인데 고려 개국공신의 후예로 선산부(善山府) 구죽산(
1889년 1월, 울진현에 '죽존(竹尊) 박영선(朴永善)'이라는 분이 안동에서 현령으로 부임해왔다. 그는 한국의 최초 신문인 「한성순보」의 주필을 맡았던 분으로 국내에서 알아주던 유명한 시인이자 문사였다.그는 자신의 영달 보다는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지식인으로서 혼란한 국내정세에 힘이 되지 못함을 개탄하였다.당시는 왜놈들이 해안 마을을 자주 침략하여
금년 여름은 유난히 짧은 것 같다세계친환경엑스포에 신경쓰다보니 어느새 여름이 다가고 바다에 발 한번 담가보지 못하고 입추가 지나갔다. 엑스포에 맞추어서 7번 국도 공사가 박차를 가하더니 기성면 망양리 터널 구간 외에는 모두 개통되었다.望洋亭(망양정)은 고려 때부터 있었으나 1860년 근남면 산포리 해안으로 옮겼기 때문에 본래의 망양정 옛터는 세인들의 이목에
의자왕은 백제 제31대왕으로 '의자왕' 하면 우선 떠오르는것이 삼천궁녀와의 음탕한 호색에 빠져 나라를 망쳐먹은 왕으로 생각한다.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편견일뿐 사실과는 크게 다르다.의자왕은 매우 훌륭한 왕이었다. 그는 재위 초기에 친히 신라의 미후성 등 40여 城을 함락시켰고 고구려 말갈 연합군을 결성하여 신라의 30여성에 타격을 가하기도 하였다.삼국사기
여기에서 신작로를 따라 북쪽으로 약 3km 정도 올라가면 금강송 군락지와 500년 묵은 금강 소나무의 멋진 자태를 감상할 수 있다. 이곳에는 타임캡슐을 묻어놓은 곳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금강송 유목을 1,111 그루를 식재하여 기르고 있기도 하다.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36번 국도와 연결되어있는데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오다 보면 하천가에 '너삼밭'이란
십이령의 열두고개는 쇠치재→세고개재→바릿재→새재→너삼밭재→저진터재→새넓재(한나무재)→큰넓재→너룻재 로서 여기가 세 번째 령(嶺)인 `바릿재' 입구이다.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열 한 고개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많다. 이 십이령은 옛날 보부상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나 관원들 등 모든
십이령이란 옛 보부상들이 흥부장에서 해산물을 구입하여 봉화의 소천, 영주 등 내륙지방으로 행상을 할 때 넘나들던 열두 고개를 말한다.보부상이란 보자기 싸서 머리에 이고 다니는 보상(褓商)과 짊어지고 다니는 부상(負商)을 합친 말이다.보부상의 기원은 신라 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처음에는 물물교환 형식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들의 조직은 방대해지고 체계
우리의 옛 선조들은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있는 이름을 붙였다.마을 이름은 물론 길 이름 재(嶺)이름 등 한결같이 해학적이고 마을의 특징을 살린 의미심장한 이름들이었다.그러나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많은 부분들이 왜곡되었거나 지형과 전혀 관계없는 이름들로 바뀐 경우가 허다하다..조선조 말 고종 때인1896년 전국을 13개 도로 나눌 때 울진은 강원도로
지난 5.12일 중국 쓰촨성에서 리히터 규모 7.8의 강진이 발생하여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망자 숫자만도 4만명이 넘었다.그 외에 매몰되어 확인되지 않은 실종자와 부상자는 아직 확실하게 파악도 되지 않은 실정이며 매일 사망자 수가 몇 천명씩 늘어나고 있다하니 재앙중에서도 대 재앙임에는 틀림없다.지진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일본 나카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
4월 5일은 한식날이다. 한식은 동지(冬至)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인데 보통 조상 산소에 사초(莎草)를 하거나 성묘를 하기도하며 나무를 심기도 한다. 보통 음력 2월에 드는 예가 많으며 3월에 드는 때도 있는데 2월 한식에는 사초하여도 3월 한식에는 사초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전해온다. 시기적으로 봄 바람이 심하여 산불의 위험도가 가장 높아 조선초에는 &
삼국유사에 나오는『철쭉동산』을 만들자 ! 울진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 김성준 필자는 지난 2001. 3월 ‘울진 자치 신문’에 삼국유사에 기록된 ‘헌화가(獻花歌)’에 대한 지역이 울진의 연지리~ 북면 고포리 사이의 어떤 해안일 것이라는 내용과 함께 이 지역에다 ‘철쭉 동산’을 만들어 역사유적지를
지난 9.4일 울진읍 읍남리(속칭 :토일동) 산 54-1번지 일원에서 문화재 연구위원들의 참여하에 공동주택을 건축하기위한 행정절차의 하나로 문화재 시굴조사 결과에 따른 지도위원회가 열렸다. 읍남리 고분은 산 능선을 따라 대형 봉토분이 북에서 남쪽 방향으로 30여기가 설치되어있고 하단부 구릉 전체에는 소형 봉토분들이 산재해 있다. 이번 조사에서 시굴된 유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