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영계곡에 단풍이 드는구나 싶더니 가을걷이때문에 그 절경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는데 첫눈이 왔다.눈인지 서리인지 모를 정도로 조심스럽게 내려 앉았다.거기에 된서리까지 내려 그동안 파릇파릇 울긋불긋 기세등등하던 풀이며 꽃들이 순식간에 삶아놓은 것처럼 풀이 죽어 있다.어제까지만 해도 예상 못했던 일이다.우리 삶의 끝도 이 된서리처럼 그렇게 갑자기 오겠지...된
얼마 전에, 필리핀에 큰 화산이 폭발하여 주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이제 우리는 대피소동 정도의 뉴스에는 눈도 꿈쩍 안하는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다.하기야 세계가 지진과 태풍, 해일 등으로 엄청난 인명피해, 재산피해를 보아왔던지라 이제는 그것이 일상이 된듯 무감각해지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예전같았으면 나도 '안된 일이구나'쯤
요즘 산골엔 달맞이꽃이 한창이다.낮엔 수줍은 새색씨처럼 얼굴을 잔뜩 가리고 있다가 세상이 모두 잠든 시간만 되면 서둘러 달을 찾는다.낯설고, 물설은 곳으로 시집와서 고되고 서글픈 시간을 보내다가 밤이 되면 달에게 제 하소연을 하는 새색씨처럼 말이다.내가 그러니까 꽃도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른다.낯설고, 물설은 곳으로 귀농하여 고되고 서글픈 시간을 보내다가 밤
요즘 사람들은 올림픽을 평생 치른다.4년에 한번 며칠 열리는 스포츠 제전이 아니다.평생을 올림픽 구호 아래 제 몸과 정신을 닥달하다 판이 끝난다.'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우리들의 윗세대는, 남보다 배굶지 않고 살아야 하니까.그러자니 남보다 돈을 많이 벌어야 했고, 어찌 어찌 죽을 똥 싸가며 돈은 벌었는데 이번에는 옆 사람보다 더 잘나가야 했다.그러나
새소리에도 강약이 있고, 늘 그 소리가 그 소리인 것같은 물소리에도 고저와 장단이 있다.사람도 마찬가지다.사람마다 인생의 악센트가 다르다.명예에 모든 에너지를 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방끈에, 돈에, 폼나게 사는 것 즉, 겉치레에 악센트를 두는 사람 등 가지 각색이다.예전엔 나도 그런 것들에 목숨을 걸었다.그러나 지금은, 최소한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우고
산골편지 쉰 두번째 - 죽이고 살리는 일2006년 4월 4일 점심부터 비가 오고 그리고 안개 자욱한 날산골에는 무쇠 화로가 하나 있다.아궁이에서 화로에 벌건 불을 담고 나면 아궁이 한 곁에 회색빛 얼굴을 하고 물러나 앉아 있는 재를 얇게 덮는다.재는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그 무엇처럼 불의 송장이 아니라 그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중요한 장치이다.그 옛날에는 며
아주 옛날, 그러니까 결혼하기 전이니 한창 팔팔 할 때다.그때 40대 수반에서 50대의 사람들을 보면 '난 저리 어중띠게 늙지 않을 것같은데..'하는 생각을 했었다.왜냐 하면 이리 팽팽한 피부가 어떻게 저리 되며, 머리칼도 어떻게 그리 허옇게 되는지 궁금했었으니까.그러나 지금 4학년하고도 중반에 서고 보니 조금은 알 것같다.갑자기 그리 되었겠는가.이런저런
산골의 밤에 마지막으로 챙기는 일이 요강이다.요강을 비우기 위해 마당에 서면 머리위가 궁금하다.아니나 다를까.이 추위에도 산골가족을 위해 일찌감치 밥을 해먹은 달과 별들이 식솔들을 거느리고 죽 나와 앉아있다.그 날카로운 모서리는 바람만 스쳐도 곧 얼어 떨어져 나갈 것만 같다.그런 산골친구들이 있어 오두막의 밤은 따사롭다.사람은 같은 것이라도 사람에 따라 느
잠이 많은 내가 요즘 이른 아침에 자주 깨는 일이 좋종 있다.허리에 탈이 나서 잠결에 뒤척이다 그 통증으로 인해 잠에서 깨는 것이다.다시 잠을 청하려 하나 바른 자세로 고쳐 눕기조차 쉽지 않다.이제 잠도 달아나고 이런 판국이라면 잠자리를 정리하는 것이 낫겠다 싶다.이 깊은 산중에 자다 깨어 홀로 앉아 보는 일은 흔치 않다.낮의 고된 노동도 노동이려니와 늦게
봄의 가뭄은 겨우내 눈 속에서 산 산골식구들에겐 오히려 반가운 일인지도 모른다.산천이 뽀송뽀송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인간사도 그렇듯이 다 좋을 수만은 없는가보다.가뭄으로 개울이 말라붙어 그 옹아리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귀가 건조하다.귀가 건조하면 이내 마음에도 버짐이 핀다.눈보다 귀다 더 마음에 가까운가 보다.그래서 마음이 건조하지 않도록 듣기를 두 배로
겨울과 봄이 제 밥그릇 싸움을 하고 있다.흰눈이 아직도 온 땅을 점령하고도 모자라 혹시 봄에게 자리를 빼앗길세라 땅을 다 얼려 놓았다.그 와중에 그 틈을 뚫고 겁없이 올라오는 놈이 있다.원추리싹.어린 것이 그 눈 속에서 동상도 안걸리고 견딘 것이 여간 대견스러운 것이 아니다.고슴도치처럼 삐죽이 머리를 내밀고는 점점 지세력을 확장해 나간다.머리부터 디밀고 보
산골에 바람이 드세다.그 바람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바람 속에 선 사람의 정신상태에 따라 그와 놀아나는 기분 또한 다르다.정신상태가 퇴색한 비로드천 같은 날은 정신질환에 걸린 사람처럼 머리 속이 쑥대밭이다.그러나 독버섯처럼 화려한 날은 바람과 내가 손발이 잘 맞아돌아간다.산중살이 5년만에 이런 터득까지 하니 이러다 돛자리 펴고 앉아 하는 벌이로 전환
날이 추워졌다.일하러 나가려던 발을 접고 마루에 앉으니 등이 시리다.그리도 나의 가을걷이 때 자기도 발 빠르게 가을걷이하던 다람쥐들이 슬 궁금해졌다. 볼에 한 움큼씩 겨울 양식을 물어 나르던 놈들이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잊고 있었다.산골에서는 저나 나나 서로의 가을걷이를 방해하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관심까지 껐던 모양이다. 언제부터 놈들이 안보이기
귀농해서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 아이들 교육문제다. 어른들이야 좋아서 왔다지만 아이들은 어떻게 교육시키느냐며 눈을 가늘게 뜬다.귀농 초든 지금이든 아랫배에 힘주며 한 말이 자연에서 배우고, 부모가 깨어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하면 눈의 흰자위만큼만 믿는 표정이다.5년이 지난 지금, 아이들이 자연에서 배우고, 부모가 깨어있고, 그리고 또
가을이 되니 산중의 농부도 똥오줌 못가리지만 다람쥐도 만만치 않음을 자주 본다.입에 겨울 양식을 볼록이 물고 이리 저리 작은 몸을 굴려 가을걷이를 하는 것을 보면 여간 신통하지 않다.오늘도 들로 나가는데 다람쥐와 마주쳤다.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가 생각나 그가 지나간 자리를 한동안 바라보았다.어느 절에 한 비구니가 다람쥐의 추수하는 모습을 보고 쫓아가
겨우내 눈 속에서 숨죽이며 있다가, 제 몸을 짓누르는 눈이 녹음과 동시에 하나, 둘 삐죽이 머리털을 내미는 원추리.햇살과 비를 먹고 하루하루 무성한 풀로 자라도 관심을 받지 못하다 어느 날 갑자기 뱀 대가리 쳐들듯 꼿꼿하게 제 목을 추켜세운다.그것도 성에 안차는지, 하루아침에 등황색 꽃을 피우고는 목에 더 바짝 힘을 준다.사람이나 꽃이나 목에 너무 힘이 들
"아빠, 너무 해요!!연호정의 연잎이 기계충을 앓은 것처럼 여기 저기 삐죽거리고 있다.못물의 색이 어떠한지를 읽기는커녕 몇 낱 없는 연잎을 보니 누가 주인(연꽃)이고, 누가 섬기는 자(못물)인지조차 알 수 없다.언제쯤이면 제 구실을 할까를 생각하다가 지금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님을 스스로에게 추궁한다.때가 되면 새 잎이 돋아 연호정을 덮을 것이고, 그들은 스
산골엔 금낭화가 한창이다.비 오고, 흐린 날에 관계없이 정을 가득 담은 주머니를 팔에 주렁주렁 달고 나와 앉아있다.어린놈은 작은 주머니를, 에미는 큰 주머니를...제 몸에 겨운 짓은 하지 않는다.꽃에서도 인생을 배우는 산골이다. 산골에 와서 안타까운 일 중 하나가 꽃밭이었다. 귀농하여 보니 마당이 아주 아담했다. 전 주인 할아버지는 차가 없으셨기 때문에 그
창호는 아침, 저녁 햇살의 밝기도 다르지만, 아침, 저녁으로 들려오는 새소리도 사뭇 다르다.아침에는 지들도 아이들을 깨우느라 분주한지 그 음의 길이가 짧다. 그러나 오후 들면서 들려오는 새소리에는 여운이 있을 정도로 장음이다.그것은 아마도 아침에 산골아이들을 학교 보내야 하는 내 마음이 분주하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차가
산골에서 가장 먼저 겨울을 떨치고 일어서는 것이 생강나무꽃이다. 진달래보다도 부지런하다.촌스러운 티를 내자면, 난 산골로 둥지를 틀고나서야 생강나무꽃을 처음 보았다.도시에서야 어디 그런 것을 볼 기회가 있는지.산이야 많이 갔지만 등산로가에는 어떤 꽃이든 살아남을 수가 없다. 혼자만 가져다 보려는 이기심이 작용하여...잎과 줄기에 생강냄새가 난다 하여 붙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