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기차 안이다. 서울 다녀오는 길이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친정 엄마와 함께 산골로 가는 중이다. 마주 앉은 엄마의 얼굴에는 거미줄처럼 삶의 편린들이 얽혀있다. 이럴 때의 감정은 다음 서울 올라올 때까지 그 옛날 기계충 흔적처럼 가슴에 여기 저기 아쉬움으로 자리 잡는다.언제면 그 흔적이 지워질까? 그 흔적의 근원은 많은 부분 나의 엄마에게 있다.
새끼손톱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봉숭아물을 보며 초승달을 떠올리는 여자는 행복하다. 벌건 대낮에 홀랑 벗고 마사지실에 누워 손톱까지 마사지하는 것도 모자라 예술 운운하며 손톱에 덕지덕지 발랐다 지웠다를 일과로 생각하는 여자들에 비하면...가끔 송사리, 모래무지, 피라미 등의 단어들이 아련히 머리에서 가물거릴 때 손에 든 호미를 놓으며 피식 미소 한 번 지을
어느 날 문득 눈을 들어보니 가을이 저만치서 제 몸단장을 하고 있다.성큼성큼 오는 것이 아니라 세월의 무게를 지고 옴인지 여간 더딘 게 아니다. 자연은 그리 서둘지 않는다. 그 뿐인가. 자신의 일부인 사람에게 표내지 않고 닥아온다. 태풍으로 온갖 것들이 떠내려 갔어도 때는 속일 수 없는 것.사람도 저리 "때의 순환''을 인식하고 산다면 , 단순하게 그리고
귀농하고 달라진 일 중 하나가 간이 커졌다는 거다. 웬만한 일은 일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고상하게 얘기하면 긍정적인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고 하겠고, 막말로는 간뎅이가 부은 것이다.추석 모습까지 찍는다고 서울까지 함께간 MBC촬영팀과 헤어져 산골로 향하는데 영주쯤 오니 태풍 매미에 대한 격앙된 보도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순간 작년에 대인 가슴에
산골아이들과 봉숭아물을 들였다. 선우는 왕발톱에, 주현이는 새끼 손가락에. 욕심많은 에미는 이런 데서도 티가 난다. 양손 도합 여섯 손가락. 어두운 밤에 염소똥만한 것을 손톱 위에 올려놓고 서로의 것을 묶어준다. 그 묶는 마음엔 내일이면 곱디 고운 빛으로 물들리라는 무지개빛 기대감이 참견했으리.다음 날 개봉해 보니 아이들과 내 손가락의 땟깔이 사뭇다르다.
가을엔 말을 아끼고 싶다. 그것은 내실을 기하자는 의지에서이다.말이 많으면 그 안은 비어있는 법. 가을에 속까지 비어보라. 그 허망함을 어찌 견뎌내는지...추석이 내일이라 서울에 가야 하는데 급한 일들이 너무 산골에 널려 있어 통제가 안된다. 아침부터 비가 오니 일이 더 더디다. 아이들을 집에 두고 밭으로, 들로 다니며 산골 비울 준비를 한다. 이사 와서부
귀농하면서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가 작물과 효소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일이었다. <식물의 신비세계>를 읽어서도 그렇지만, 자연의 모든 생명체도 감정이 있어 음악을 좋아하고, 사람의 칭찬을 좋아한다는 생각에서였다.그 때부터 초보농사꾼은 대형 앰프며 스피커를 사나르기 시작했다.그러나 그 혈기는 어디로 가고 그것들은 발효식품처럼 오두막 한켠에서 숙성되
이제 8월이 코앞에서 알짱거린다.산골의 여름은 사람 잡는줄 알았는데 여름다운 모습 한 번 못보고 입추를 맞이할 판이다.햇빛 구경하기 힘드니 작물이든 사람이든 곰팡이가 안나고 배기겠는가. 햇살 가득한 날은 서로 달려 나가 제 몸에 핀 곰팡이를 말릴 일이다.며칠 동안 산골이 북적북적했다. 서울의 경희대 노래동아리 학생 여섯 명이 농활을 왔다. 며칠 전 조카가
비오고 흐린 날이 계속되다 보니 별 볼 일이 없다.하루 일을 마치고 요강을 비우러 가면 머리 위가 궁금하다. 연고도 없는 곳에 온 내게 그리 다정하게 대해주던 친구들이 있으니 내겐 각별하다. 오늘은 빗속을 뛰어가 요강을 오줌통에 비우고 잽싸게 뛰어들어 왔다. 비를 털고 들어오려니 별친구들은 혹여 많은 비에 별일은 없는지가 궁금해졌다. 다시 마당에 선다. 하
작년에 산골에서 개사료를 먹어 치우는 등 하루가 멀다 하고 일을 저질렀던 까마귀들이 몇 달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아 내심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그것도 잠시 그들은 그동안의 공백이라도 보상하려는 듯 요즘 아이들처럼 정서불안증을 보이며 온 마을을 뒤흔들고 다니기를 며칠. 그러더니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게 구석에서 홀로 소주잔을 기울이시던 마
송홧가루 날리던 황홀한 시절이 지나니 그리 허전할 수가 없다. 자연은 그래도 인정스러워 그 한숨소리를 찔레나무가 받아준다.제 몸에 난 가시를 감추려고 하얀 손을 내밀며 제 몸의 향기까지 싸잡아 내 시선을 끌려하지만 솔직히 은은한 파스텔톤의 송홧가루만 어림없다. 그나마 찔레꽃이 제 갈길을 가고나면 그 뒤를 이을 군번은 누군지 조급증이 난다. 아마도 앵두와 오
작년에는 그리도 멋들어지게 치장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특이한 음성으로 시선을 끌려 용쓰던 새들이 올핸 그다지 수선을 피우지 않는다.재래식 화장실 문을 열고 볼 일을 보다 보면 앞 산 소나무에서 공중제비를 하며 더 강력한 몸짓으로 알짱거리던 놈도 보이지 않는다.설령 알짱거려봤자 새 이름에 까막눈인 내가 다정스레 이름 한 번 못 불러 주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산골에서는 굳이 달력으로 때를 가리지 않아도 된다. 자연에서 소리 없이 보여 주는 것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활자화된 달력은 알아서 멀리 비켜나 있다.그렇기에 도시에서보다 침묵이 더 가치를 발하는 곳이 산골이다. 차분히 내 마음의 소리를 듣고, 자연이 일러 주는 것들에 나를 내어맡기면 시시콜콜하게 떠오르는 잡념 따위는 민들레 홀씨처럼 멀리로 날려 보낼
산골에서는 숲이 제일 먼저 깨어나 부산을 떤다.언제부터 돌아왔는지 알 수 없는 새들이 이 나무, 저 나무 사이를 오가며 나무를 깨우고, 그 나무까지 합세하여 온 숲을 눈뜨게 한다. 그러고나면 다람쥐와 도마뱀이 졸린 눈으로 씻으러 개울로 가는 소리, 어린 나비의 학교 갈 준비하는 소리로 숲은 또 한 번 들썩인다. 새들의 자명종 소리에도 잠 못 깨는 오두막의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에 솔솔 재미를 붙였다. 요즘.예전에는 비 오면, 당연히 떨어지는 소리로 쯤 생각하고 잠시 `귓길'을 주면 그만이었는데 요즘은 눈길을 끊고, 귓길만 열어두니 겨우내 건조한 가슴에 한결 생기를 돋게 한다.우리는 일순간 보는 것으로 기쁨을 찾고, 쉽게 이해하는 것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그 때문인지 듣기보다는 말하는 것에 더 익숙하다. 그러
3월이 되니 개울의 옹알이 소리도 제법 여물어졌다. 바람도 칙칙한 옷을 한 겹 벗어던졌는지 날렵해 보이고, 바람이 늘 놀다 휘젓고 간 숲도 그 때깔을 달리하고 있다. 그리 잘 나가다가 눈이 온다.어제도 오고, 성이 덜 찼는지 오늘도 같은 속도로 내리 꽂히고 있다.그 눈이 숲에 앉으면 숲이 되고, 밭으로 제 갈 길을 정하면 밭이 된다. 호수밭 웅덩이에 앉으면
베트남의 속담에 “다정하게 말하는 것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당연한 말 같지만 현실은 멀기만 하다. 일전에 목욕을 갔을 때의 일이다. 도시에서와는 달리 산골로 와서는 발을 발로 취급하고 신경을 안 썼더니 겨울엔 터지고 피가 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목욕 온 참에 발뒤꿈치를 밀려니 밀개를 안 챙겨 온 것. 용기를 내어 입가에 잔뜩 미소를 달
오늘은 마실을 갔었다. 바람이 세찼지만 마음 한 켠에 뭉클함이 있어 꽃버선 신고 나섰다. 오두막에서 멀지 않은 곳 개울가. 지난 여름 태풍 루사가 왔을 때 간도 크게 강이 되어버렸던 그 개울가. 지금은 기가 죽어 겨우 숨만 쉬고 있다. 그 곳에 쭈구리고 앉아 그의 소리를 들어주기만 했다. 사는 동안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두 배로 했던 자신이 기형임을 이제사
바람이 없는 날 밭에서 일하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에도 물기가 말라 허기를 느낀다. 잠시 오두막으로 내려와 냉수 한 대접 들이키니 지금이 겨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산으로 도망을 갔던 닭들이 돈이 떨어졌는지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더군다나 암수가 나란히 야반도주, 아니 대낮도주(닭은 야맹증이 있으니..)를 했으니 내 눈이 더
'이제 초등학생까지??' 바람이 이리도 차가울 수가 없다. 한겨울을 오두막에서 견디게 하기 위해 혹독한 초겨울을 나게 하는 자연의 배려에 군말 않고 찬기를 받아들인다. 겨울로 가는 길목이라 그런지 오두막 주위가 을씨년스럽다. 내년 봄에는 산수유나무도 심고, 이곳에 될지 모르지만 매화나무도 심고 싶다. 세월의 흔적이 짙은 오두막일지라도 그 주위에 자리잡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