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비석에 많은 구멍들...
황 현령에게 불만이 컸는지, 자식 낳기 원하는 기자신앙인지
알 길은 없으나 재미난 유적

봉평신라비 전시관 입구에는 울진지역에 분산되어있던 조선 시대 비석 45기를 모아 전시하였다. 그 중 맨 앞에 울진 현령을 지냈던 「현령 황진규의 애민 선정비」가 있다.

비석의 형태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비석 양식으로  민머리 호형이며 다른 비석에 비해 다소 큰 편이다. 높이 1.8미터 너비는 윗부분이 60cm  아래쪽은 50cm로 윗부분이 약간 넓다. 비석의 두께는 10cm정도로 약간 두터우며 청석이다. 비석의 앞면에만 각자가 되어있는데  「縣令黃公鎭奎淸德愛民善政碑」「癸酉九月 日 堅」라고 음각되어있다.

이 비석이 세워진 것은 1873년 9월(고종10년)이며 앞면에 쓰인 「..黃公鎭奎淸..」의 글자는 예리한 금속편이나 모난 돌로 마구 쪼아 글자를 알아  보기 힘들게 훼손되어있다. 아마 황진규 현령의 공적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일부러 훼손한 것으로 보인다.

비 뒷면에는 글자가 없으며 성혈과 흡사한 원형 구멍이 9개가 파여 있다. 원형의 크기는 큰 것이 지름 16cm깊이 6cm 정도이다.

성혈(性穴)은 본래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에서 많은 나타나는데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 사람들이 하늘에 기원하는 의미로 돌에 새긴 것이다. 자연 암반에 새긴 것도 있고 고인돌의 개석에도 새겼는데 성혈 문양과 모양이 매우 다양하고 하늘의 별자리를 상징한다고 하며 의미는  주로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이 현령 애민비는 선사시대가 아닌 조선시대인 점을 감안하면 고대 사람들의 성혈과는 다른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왜 조선시대의 비석에서 성혈이 나타난 것일까? 필자의 짐작으로는 고대인들의 성혈과는 무관하며 기자(祈子)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교사상의 깊은 관념의 틀 속에서 살았던 조선시대 여인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면 칠거지악에 해당되어 시집에서 쫓겨나도 할말이 없었다. 출가한 여인에게는 자식을 낳는 것이, 특히 아들을 낳는 일이 생명과도 같이 중요한 사명이었다.

아이가 들지 않으면 절에 가서 100일 기도를 한다거나 산천의 돌이나 고목에 정한수를 떠놓고 빌었다. 부처의 코를 갈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 하여 사람의 눈을 피해 부처의 코를 잘라 갈아먹는 예가 허다하였다. 지금도 박물관 같은데 가서 옛날 부처상을 보면 많은 부처들이 코 부분이 반질 반질하게 닳아있거나 떨어져 나간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자식을 원하는 부인들이 부처의 코를 만지거나 코를 떼어 갈아 먹었기 때문이다.

이 비석의 성혈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될 것 같다. 비석의 주인공인 황진규 현령의 가계에 대하여 조사해 보진 않았지만 아마 모르긴 해도 황진규 현령이 아들을 여럿 두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니면 어떤 이가 이 비석의 돌을 갈아 먹었더니 아들을 낳았다고 소문이 났을 수 도 있다. 그래서 자식을 원하는 여인들이 비석 돌을 갈아 마신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울진군지(1971년판) 수관편에 보면 황진규 현령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黃 鎭奎 -武堂이니 辛未六月 到任 癸酉 十月 政故爲 仍任 甲戌七月遞歸 壬申 城底鄕校 移安 玉溪 居懷仁」이라고 기록되어있다.

황진규 현령의 재임기간은 1871년 6월~1874년 7월로 약 3년간 울진 현령으로 재직한 분이다.

이 비석은 2011년 6월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으로 옮기기 전에는 울진 읍내리의 월송공원 올라가는 길옆 비석군에 있었다. 그러나 그 전의 본래있던 자리는 어디인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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