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의 봄은 몇 월일까. 해마다 궁금해 하는 부분이다.

삭막한 숲에 새들이 찾아들어 옹알거리기 시작하고, 눈 속에서도 푸릇한 싹이 쥐젖 만하게나마 나오는 3월을 봄이라 할까? 4월에도 눈이 오지만 말 그대로 '봄눈 녹듯' 하니 많이 봐줘서 4월을, 뭐니 뭐니 해도 봄의 전령사인 개구리가 목청을 가다듬는 4월을 봄이라 할까?

3월이든, 4월이든 판가름이 난다고 산뜻하고 그것이 어물쩍 넘어간다고 하여 신생아처럼 얼굴 구길 일도 아니다.

다만, 계절이 바뀌는 일이 손바닥 뒤집어지듯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확실히 안다.

그처럼 견고했던 모습을 바꾸기 위해 하루하루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자연은 준비운동을 했을 다.

얼어붙었던 땅 속에서 발가락도 꼼지락거렸을 것이고, 추위를 견디기 위해 살갗을 두껍게 무장했던 나무들도 파리한 싹이 매끄럽게 나오도록 모공을 열어두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있는 자연 앞에서 얼치기 시골사람 행세하는 나만이 늘 아무런 준비와 노고 없이 날로 봄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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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선우가 4월 중순에 군입대를 한다.

그러다 보니 이번 학기부터 휴학을 하고 기숙사의 짐보따리를 싸서 서울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이내 아빠 야콘즙 작업하는 것을 도왔었다.

추운 날, 야콘을 일일이 씻고, 큰 야콘은 잘라서 야콘 중탕기에 넣고, 야콘즙 포장하는 것을 돕느라 정신없는 날을 보냈다.

그러면서 젊은 나도 힘든데 아빠 고생 많으셨다는 말꼬리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그러다 입대 날짜가 다가오니 친구, 선배도 만나고 교수님도 뵙는다며 서울로 간단다.

그래서 내가 엄마의 스승님을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의중을 떠봤다.

"엄마, 그럼 영광이지"라고 씩 웃는 아이.

내가 이런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엄마가 존경하는 분을 뵙게 하고 싶은 마음이고, 둘째는 '인간관계'에 대해, '인연'에 대해 입 아프게 침튀겨가며 설명하기 보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면 저절로 체득하게 된다는 생각이었다.

엄마가 어떻게 좋은 분들과 꾸준히 연락하며 따뜻하게 지내고, 삶을 배우며 소풍길을 가는지 보여주는 것 이상 좋은 교육이 있을까.

평소에도 아들은 내게 '엄마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이들어 가면서도 스승님들과 끊이지 않고 연락하며 지내는 모습이 좋다' 고 말해왔던 터였다.

이번에는 최광 교수님께 전화를 드렸다.

군대갈 아들이랑 뵈러 간다고...

내 첫 번째 책의 추천글도 써주시고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하셨던 분이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

맛있는 거 사줄테니 어서 올라오라고 하셨다.

서울로 미리 간 아들이랑 약속장소에서 먼저 만났고, 이어서 교수님이 나오셨다.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무엇보다 마음이 환해졌다.

교수님께 아들을 소개시켜 드리고 교수님이 안내해 주시는 곳에서 세 사람이 점심을 먹었다.

디저트로 선우가 좋아하는 케익을 먹으러 가자고 하셔서 우린 다시 제과점에 다시 앉아 대화를 이어갔다.

교수님 역시 독서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주례사도 독서 이야기를 하실 정도라신다.

아들 선우 역시 책 이야기라면 밤을 새서 들어도 질리지 않다고 하는 아이이니 눈에 힘을 바짝 주고 교수님 말씀을 귀담이 듣고 답하고 하는 것이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잠잠한 호수에서 돌수제비를 하듯 그렇게 마음에 잔잔한 무늬를 만들어 가기에 충분한 만남이었다.

대화가 무르익을수록 시간도 숨을 할딱이며 저만치로 도망간 상황.

이제 세 사람은 손을 맞잡으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입을 열었다.

엄마의 스승님을 만나 뵙고 네 가지 놀랐다며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첫째는 뼛속까지 학자라는 분을 만났다는 것이 자신에게는 영광이었다는 것.

정년을 1년 정도 앞두신 노교수님께서 연구에 대한 열정이 젊은이들보다 더 끓어넘치는 모습을 보고 놀라웠단다.

둘째,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시면서 이제 막 홀로서기를 시작한 젊은이의 말 하나하나를 귀담아 들어주시고 일일이 답해주시는 여유롭고 인자하신 모습이 뇌리에 오래 박힐 것같단다.

셋째는 제자 아니 제자의 아들. 이제 막 사회에 나온 어린 사람에게 요즘 읽은 책 중에서 추천해주고 싶은 책 있으면 적어달라며 들고 나오신 책과 연필을 건네시는 모습에세 고개가 숙여지더란다.

교수님 연세에 지금껏 읽으신 책이며 지식으로 치면 넘쳐나실텐데도 누구에게나 눈높이를 낮추어 함께 나누고, 얻으시려는 그 자세에 반했다고 덧붙였다.

그랬다.

교수님은 아들 선우와 책이야기를 하시더니 감명깊게 읽은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셨다.

넷째는 아무리 어린 사람의 말이라도 상대방의 말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교수님의 의견을 말씀하시는 점이 마음이 들어와 계속 신경쓰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단 한 번도 엄마나 자신의 말 중간에 말씀하시는 법이 없으시더란다.

교수님과 헤어져 아들 선우가 다니던 학교까지 걸어가면서 난 새로운 '인연'에 대한 감동, 깨달음의 후렴을 오래도록 들었다.

아들은 교수님께도 좋은 책을 추천해 주십사하고 부탁을 드렸고, 메일로 책목록을 보내주신다며 아들의 메일주소를 받아적으셨었다.

다음 날 아들은 교수님의 메일을 확인했고, 자신이 꼭 추천드리고 싶은 몇 권의 책과 외 그 책이 가슴에 남는지의 후기를 곁들여 교수님께 보내드렸다고 했다.

이제 아들은 하얀 종이와 연필만 달랑 든 청춘이다.

하얀 종이에 밑그림을 하나하나 그리며 뼈대를 세울 것이고 좀더 시간이 지나면 그 뼈대에 색을 입힐 것이다.

다만 어미로서 난 그를 지켜보면 된다.

되도록이면 입은 닫고, 눈을 크게 열고 그를 지켜보면 될 일이다.

그러면 청춘은 자신을 길을 스스로의 힘으로 잘 헤쳐나갈 것으로 믿는다.

라일락처럼 진한 '인연'의 향기도 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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