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면 벌써 4월을 맞는다.

 4월은 1919년 3.1 만세 운동 때 울진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달이다.

1919년 3.1일, 일제에게 나라를 잃고 압박과 설움속에 참아오던 우리민족이 드디어 그 울분의 불씨를 터뜨리며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를 불렀다.

우리의 역사에 길이 남겨질 유관순 열사의 만세 사건도 이때 일어났다. 파고다 공원의 만세 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검거에도 꺼지지 아니하고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만세 대열 속에는 서울에 유학하던 울진출신의 젊은 청년들도 참여하고있었다.

정재용(鄭在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이를 시발로 만세 군중은 왜경들의 총부리에 가슴을 내밀며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각오로 행진을 진행했다. 이때 읽혀졌던 ’독립선언서‘가 울진에 전달되어 울진의 만세운동에 도화선이 된 것인데 독립선언서가 울진에 어떻게 전달되었는가 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울진의 독립운동사』에는 독립 선언서가 울진에 전달된 경로를 두가지로 보았다.

하나는 울진구군지의 기록을 들어 ‘울진 근남면 행곡리 장식(張植)이 2월 상경하였다가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 1장을 숨겨 3월11일 고향으로 내려와 윤병관(尹炳寬)에게 몰래 전했다’ 라는 기록과 ‘ 북면 지장골 사람으로 4월10일 매화 독립 만세를 주도한 전병겸(田炳謙)이 서울 중앙감리교회 전도사로 있는 그의 외조부 홍규익으로 부터 비밀서신을 양주사람 박사형을 통하여 전해 받았는데 그 쪽지 서신에 교회가 앞장서 독립만세를 주동해야 한다는 내용이 공약 3장과 더불어 기록된 일종의 전단지 였다’ 라는 신군지 내용이다.

 

▲ 만세운동의 발상지 매화 남수산(嵐峀山),

 

장식의 전달과정을 예로 든다면 울진에 내려온 장식은 친구인 윤병관과 협의 하여 울진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협의한다. 그리고 가장 먼저 4.11일 매화장날을 기해 만세를 부르기로 하고, 다음날인 12일에는 울진읍장에서, 그리고 13일에는 북면 흥부장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밀약하였다. 울진의 만세 운동을 주도한 청년들은 대부분 울진의 만흥학교 출신이며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만흥학교‘는 쓰러져 가는 조선을 살리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던 청년들이 세운 학교로 1907년 주진수 선생이 주도해서 세워졌었다.

만흥학교는 한일 합방과 함께 국권이 강탈 당 하면서 폐교된 것으로 보여 불과 3~4년 정도 밖에 존속되지 못하였지만 인문학, 측량학 등 현대문명을 교육하였기 때문에 울진으로서는 희망의 불빛이었다. 울진의 만세 운동은 바로 이 만흥학교 출신들이 대다수 앞장서서 주도하였다.

울진의 만세운동은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만세사건이 일어난지 약 한달 후인 4월 11일, 매화장날을 택해 처음 만세운동이 점화 되었다.

4.11일 자정에 몇몇 청년들은 매화장터 뒷산인 남수산에 올라가 횃불을 흔드는 것을 신호로 장터에 잠복해 있던 청년들이 일제히 주민들을 동원해서 만세를 부르기로 되어있었다.
매화 장터에는 일본 군인들이 주재하던 주재소가 있었지만 청년들은 용의 주도하게 비밀리에 일을 진행시켰다.

한 밤중에 청년들이 남수산 꼭대기에 올라가 횃불을 흔들자 주민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일제히 장터로 뛰어나와서 만세를 불렀다.

만세 소리는 아직도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야심을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일경들이 이리뛰고 저리 뛰어도 성난 군중들을 잠재우기에는 턱도 없었다, 차차 날이 밝아지자 인근 부락에서 모여든 장꾼들이 합세해서 시간이 갈수록 군중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통제불능의 지경으로 확산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지역의 많은 애국 청년들이 왜경들에게 체포되었고 정식 재판 까지 간 사람도 11명이나 되었다.

다음날 12일에는 울진 감리교회에서 준비를 모두 하기로 했었으나 전날 매화의 만세운동 때 많은 젊은이들이 체포되었거나 예비검속을 받았고 준비가 미흡하여 만세를 부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인 13일날은 예정대로 흥부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날의 만세 운동은 칠보산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전개되어 며칠간 이어졌다. 이 만세 운동으로 주도했던 청년들이 12명이나 체포 되었고 태형을 맞거나 훈방된 민간인들도 많았다. 어떤이는 재판 끝까지 가서 징역 2년을 받은 사람도 있고 출옥후 고문 휴유증으로 사망하기도 하였다.

울진군지에 보면 남들은 목숨을 걸고 만세를 부르는데 그 틈에 장사나 할려는 얌체 족속도 있었다고 한다.
가게를 하던 어느 할머니는 만세는 부르지 않고 장사만 하려는 아들이 있어서 ‘조선 백성으로 태어나서 맞아 죽더라도 만세를 불러야지 장사는 무슨 장사냐?’ 하면서 아들을 만세꾼 속에 밀어 넣자 그 모습을 보고 장사하던 상인들이 모두 가게 물건들을 팽게치고 만세대열에 합세했다고는 일화도 전한다.

만물이 생동하는 희망의 4월. 민족의 울부짖음을 토해내던 만세의 4월.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동해안 시대, 울진도 이제 긴 기지개에서 깨어나 동해안 중심이 되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한민족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ㅣ1988 『울진의 독립운동사』울진문화원2011 『울진군지』울진군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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