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에는 내가 귀농하기 전부터 나보다 먼저 주인행사를 하고 있던 몇 그루의 모과나무가 있다.

5월에 연분홍 꽃을 피운다고 하던데 난 아직 제대로 꽃을 확인하고 향기를 맡아보고, 그 꽃과 향기에 걸맞는 의상을 입고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가을에, 그 높은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모과 따기에 지랄발광을 했지 정작 그 모과가 어디서 생겨났는지 그 출처를 아는 데는 몰인정했다.

어느 꽃이 피었다 떨어지면 그 자리에 모과가 열매맺는지는 관심을 두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래도 입은 터졌다고 변명을 하자면 모과나무가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후미진 곳에 서 계셔서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는 거다.

아무리 후미진 곳에 서 있더라도 가을, 겨울에는 잎이 지고 뼈만 남아 있어 모과나무가 언덕 위에서 육안으로 확인이 되지만, 봄이 되어 나무들이 각자의 잎을 조선이 좁다하고 서로 뻗치기 시작하면 주위의 두릅나무들까지 잎과 가시를 치켜세우며 위협하는 통에 모과나무는 자신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입도 뻥끗 못하고 죽어지낸다는 거다.

그러니 아무리 언덕을 오르내려도 소닭보듯 해서가 아니라 지리적으로 그를 발견하기란 어렵다는 거다.

이쯤으로 입가진 자의 변명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제멋대로 생겨먹었지만 그 특유의 향을 지녀 겨우내 따뜻한 차로 변신하는 모과나무에게 기별을 해두었다.

내년에는 세상 없어도 내 5월에 연분홍 핀을 가지마다 매단 너를 보러가겠노라고...

 

아들을 대구의 훈련소 연병장에 내려놓고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나올 때, 구두에 뿌연 먼지가 소복히 덮였었다.

훈련소 가기 전 날, 아들 구두를 닦으며 너의 군대생활도 광이 나길 바라는 마음에 힘을 주었었다.

그 김에 내 것과 초보농사꾼의 구두도 닦으며 그리움도 빛으로 승화되어 훗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을 수 있기를 바랬었다.

그러나 다져먹은 마음은 훈련소 연병장에 들어서자마자 기가 있는대로 꺾이더니 반짝반짝 광이 나던 구두도 일순간 먼지 투성이가 되었었다.

어제 그 구두를 다시 닦았다.

오늘 우리 아들을 보러가므로...

오늘은 일찍 일어났다.

아니, 솔직한 표현으로는 거의 꼴딱 샜으니 일어나고 자시고도 없었다.

면회했을 때, 아들이 흰머리 투성이인 나를 보면 마음 아플까봐 새벽에 난생 처음 내가 직접 염색을 했다.

워낙 바삐 돌아가는 산골 일에 염색하러 읍에서 긴 시간을 우아떨며 보내기는 어려움이 많았다.

혼자 집에서 염색하기는 머리털나고 첨이다.

혼자서도 거품을 내며 끄떡없이 염색을 해낼 수 있다는 광고를 본 기억은 있어서 부러 어제 읍까지 가서 사왔다.

최신식, 초간편에다가 끝내주게 멋있다는 염색약으루다가 가격도 보지 않고 질렀다.

그러나 처음 해보는 염색인데다 귀신같이 깜장머리를 해야 우리 아들이 눈치채지 않는다는 부담감까지 가세하여 염색약 통을 누르자마자 반은 벽에다 칠갑을 했다.

나머지도 치과의사가 구석구석 스케일링하듯 후미진 곳까지 염색을 하려니 치켜올린 두 팔에 쥐가 났다.

그러나  이 잡듯 야무지게 칠을 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면 아까 칠한 저쪽 구석의 색깔과 마지막으로 칠을 끝낸 이쪽 구석의 색깔이 달라진다는 생각은 못했다.

염색의 기본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망한 작품이지만 작품을 끝낸 새벽에 난 잠을 청하지 못하고 정물화처럼 오래 앉아 있었다.

내일 아니, 이따가 만날 아들의 얼굴이 미리 눈에 들어올 때마다 에누리 없이 딱 그만큼의 눈물이 밀려나왔다.

솔직히 며칠 동안 감자를 얇게 썰어 평소에 안하던 얼굴에 마사지도 다 했다.

되도록 아들에게 엄마의 환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그래야 우리 아들 마음이 우선 환해진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러나 정작 면회 당일에는 이런 청승을 떠느라 잠을 제대로 못잔 탓에 이른 아침 훈련소로 가려고 보니 얼굴은 푸석푸석했고, 눈은 토깽이 눈처럼 벌갰다.

11시부터 수료식이 시작된다고 했고 10시부터 부대를 개방한다고 했다.

난 통박을 굴렸다.

군대이고 수료식에 별(?)이 뜬다고 하니 이름만 불러도 모가지가 뒤로 꺾어져라 제 이름을 질러대는 군대 촛자들을 아침 일찍부터 연병장에 불러 모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니 멀리서나마 까까머리들 중에 내 아들 얼굴을 찾아 보게 10시 정도에 맞춰 일찍 출발하자고 했다. 초보농사꾼더러...

그러나 우리들의 초보농사꾼은 나의 그런 예민한 계획에 늘 찬물을 끼얹어 왔었는데 오늘이라고 별 수 있는지..

재를 안뿌리면 박찬득이 아니지...

아니나 다를까.

남들 안가는 군대간 것도 아닌데 뭐하러 그 시간에 가느냐 11시 전까지만 가면 돼지....읊으셨다.

내 거기다 대고 단 한 마디만 해주었다.

자식이랑 탯줄로 연결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이 마음 죽었다 깨나도 모른다고...

자신의 뱃속에서 한 몸이 되어 생명을 키워내보지 않은 사람은 감도 못잡는다고...

듣고나니 섬뜩했는지 서두르는 눈치였지만 이미 시간은 흘러가신 상태.

빠듯한 시간에 대구로 내달리다 보니 칠곡으로 빠져나가는 이 정표를 보는 순간 초보농사꾼이 헛갈린다.

1,2초 안에 결정하지 않으면 북대구인지에서 빠져나가는 것인가 본데 초보농사꾼은 후자쪽에 믿음을 가졌다.

나야 길치이니 어디로 빠져나가는 것이 맞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이거 마누라가 일찍 가자했을 때 말 들었으면 늦어도 후환이 두렵지 않았겠지만 11시에 딱 맞추게 도착하든지, 재수 없으면 지각하게 생겨먹은 터라 초보농사꾼이 차를 우측에 비상 정차시키고 잽싸게 네비를 켰다.

네비의 여자가 지금 코앞의 칠곡에서 빠져야 한다고 친절히 일러준다.

지나쳤더라면 사단이 날뻔했다.

그렇게 네비가 시키는대로 가보니 지난번 아들을 떨구고 돌아나온 부대가 보였다.

부대를 본 순간, 벌써부터 아들 얼굴을 본 듯 가슴이 쿵쾅쿵쾅 도리질을 하고 눈물은 공들인 화장을 일순간 범벅으로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가족들이 벌써부터 와서 양쪽 차양 밑에, 단상 뒤에까지 느긋하게 다 진을 치고 새색씨처럼 앉아 있었다.

두어 가족만이 오뚜기처럼 서있는 자식을 찾으러 돌아다닐 뿐.

식순에 따른 연습을 계속하고 있었던 듯 이제 곧 식이 시작된다는 중대장의 멘트가 흘러나오는 것을 이제 아들을 찾아보라는 멘트처럼 허둥지둥 얼빠진 모습으로 헤매는 이 어미...

나누어준 배치도에서 아들이름까지 찾았고 그 그림에 따라 아들을 찾는 건데도 시간촉박함과 그로 인한 떨림, 흐르는 눈물이 커피믹스의 3박자처럼 뒤섞여 찾아낼 도리가 없었다.

이윽고 부랴부랴 주차하고 나중에 도착한 초보농사꾼이 “선우야!”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지척에 두고도 아들을 못알아 보았던 것.

감싸안은 아들은 입소 때보다 말라있었다.

아들 입에서 “엄마”라는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내가 그의 엄마라는 것을 처음 안 것처럼 난 놀라 아들의 가늘어진 허리를 놓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필 이럴 때는 뭔가 뿌연 물 같은 것이 항시 망막을 덮었으므로...

그 짧은 사이에도 뒤통수에서는 ‘이제 훈련병들 사이에 계신 부모님들은 나중에 찾으시고 가족석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라는 멘트가 연발 터져나왔다.

단체행동에서는 나름 칼같은 성격이니 잽싸게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사단장이 뜨자마자 식이 시작되었다.

“빰빠라빠 빰 빰빠바,~~~

빰빠라빠 빰 빰빠바~~~"

두 번이 울렸다.

그게 두 번이라는 건 투 스타가 뜬 것이라고 초보농사꾼이 귀뜸해주었다.

그러나 미리미리 와 자리잡고 앉은 엄마들을 보자, 다른 엄마들이 도착할 때마다 예행연습을 하면서 울엄마일까 두리번거리고 실망하고 나중에는 우리 엄마가 늦으실 리 없는데 하며 걱정했을 아들 생각에 일찍 집에서 출발하지 못함에 삐져서 ‘빰빠라빠 빰 빰빠바’를 두 번하고 세 번 하고가 귀에 들어왔을까...

대구의 날씨는 제 값을 했다.

따갑다 못해 살이 벗겨져 금방이라도 고기타는 냄새가 날 것같았다.

난 차양 안 그늘로 들어가지 않았다.

훈련병들은 새벽부터 아니 어제부터 이 태양 아래 연습을 했을텐데, 하는 마음에..

수료식이 시작되었다.

다른 여느 식순처럼 국기에 대한 경례도 있었는데 군인인 아들의 거수경례를 받으며 하는 국기에 대한 대한 경례는 가슴팍에 댄 손바닥이 달아오를 정도로 뜨거웠고, 찡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이번에는 계급장을 달아주는 순서란다.

다른 졸업식 등의 행사처럼 대표에게만 계급장을 달아주는 것으로 알고 사단장이 어느 한 대표에게 달아주는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많은 차양 밑에 우아하게 앉아 있던 엄마들이 일제히 훈련병들 사이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니 식도 안끝났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해 있다가 그때서야 나도 아들에게 뒤늦게 달려갔다.

물론 초보농사꾼도 어안이 벙벙하여 그때서야 아들에게 가고...

달려가 보니 아들은 오뚜기처럼 각잡고 서서 팔을 위로 접은 다음 손바닥을 하늘을 보게 하고 있었다.

이게 뭔 일인가 했는데 초보농사꾼은 벌써 알아차리고 아들 손바닥에 놓인 담배 반 토막만한 계급장을 아들 가슴에 붙여주었다.

그제서야 제대로 엄마, 아빠 얼굴을 본 선우가, 아빠가 계급장을 달아줄 때, 훈련소에서 부모를 돌려보내던 그 발자국 소리를 기억하며 그리움에 떨었다던 선우의 눈에서 눈물이, 그리움만큼이나 조용히 흘렀다.

초보농사꾼도 그것을 알았겠지만 자신의 벅참이 들킬까봐인지, 남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지 않아야 함을 어거지로라도 실천하려고 했는지 그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계급장을 확인하는 초보농사꾼의 어금니에 힘이 바짝 들어갔음을 보았다.

이번에는 시간에 쫓기지 않고 안아주었다.

그런데 사단이 난 건 바로 그때였다.

선우 바로 옆에 선 몇 명의 훈련병들은 주위의 엄마들이 발광을 하듯 아들을 끌어안고 울고불고 할 때 아까 모습 그대로 계급장을 손바닥에 올리고 군기 바짝 든 모습으로 서있었다.

태양은 치사하게도 그들에게만 더 따갑게 내리쬐며 더 강한 조명역할을 해대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본 내가 끌어안았던 아들을 놓고 “아이고, 아이고”소리를 내며 통곡을 하기 시작한 것...

‘누구도 오지 않은 거야. 이를 어쩌나. 가족이 안오면 지 손으로라도 계급장을 달고 차렷하고 있지 않고 왜 팔 아프게, 서럽게 각 잡고 저렇게 서있는지..’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드디어 선우에게 귓속말로 사정했다.

“선우야, 저 훈련병들 계급장을 아빠가 대신 달아주면 안되는 거니?”

“엄마, 부모님이 아마 오실 거야.”

“오시긴 벌써 부모님들 밖으로 나오라고 하잖아.”

“우리 엄마, 마음아파 이러시는구나. 근데 그 엄마가 오시면 어쩌려구. 걱정마 엄마, 오실 거야.”

“지금 다 나가라는데  아직도 저러고 있으니..”

아들은 “우리 엄마, 우리 엄마”하면서 내 등을 토닥였다.

이제 진행 중대장의 지시에 따라 가족들이 다 차양 의자로 되돌아갔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까 식이 시작할 때 모습대로 태연히들 앉아 있었다.

난 주위 아이들이 아직도 팔 들고 손바닥에 계급장 놓고 서있는 모습에 가슴아파 울고, 안스러워 울었다.

그 놈의 “아이고” 소리는 왜그리 뿜어져 나오는지...

다른 가족들은 아들을 만나 내가 감격하여 엉엉 우는줄 알고 태연했다.

자식키우는 사람은 말이다.

다른 아이도 다 내 자식인 듯 눈에 들어와야 하는 게 엄마다.

엄마는 탯줄이 자식과 연결되어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고 감격하고를 박자 맞춘 사람이다.

다른 자식도 그 엄마와 그랬다는 것쯤은 기본빵으로 알고 느끼며 살아야 그게 엄마다.

내 자식 만나 기뻐하는 것도 잠깐, 옆의 다른 자식은 부모가 안와 그러고 그 자리에서 손바닥에 그 놈의 계급장을 올리고 각 잡은 모습으로 태양을 받고 있는 아이가 내 자식인 듯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나도 칠곡에서 빠져나왔으니 망정이지 북대구인지 어디까지 갔더라면 내 자식도 그렇게 하고 있었을 생각에 아찔했고, 저 아이 엄마도 어디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애타할까 생각하니 대신 달아주고 싶었던 거였다.

초보농사꾼도, 선우도 내가 ‘아이고, 어쩌냐’ 소리를 연발하며 우는 그 이유와 내 성격을 잘 알기에 “부모가 온다잖아”하며 나를 위로했다.

왜 계급장을 부모가 달아주느라 마음 아픈 아이들이 생기게 하는걸까?

옛날에도 그랬냐고 초보농사꾼에게 물으니 옛날에야 어디 계급장을 부모가 달아주느냐고 했다.

최근에 생긴 풍경인가 보다.

부모를 배려하는 마음은 좋지만...(여기서 말을 아껴야할 듯...)

식이 계속 되었다.

이번에는 투 스타인 사단장이 단상에서 내려와 부모들이 앉아 있는 곳을 일일이 다니며 인사를 했다.

그것 역시 그 옛날에는 없던 모습이 아닐까...

식이 다 끝났다.

그러나 복병은 또 있었다.

식이 다 끝나고 진행을 맡은 중대장이 몇 명의 훈련병을 단상 앞으로 불러 세웠다.

거기에 선우도 불려 나갔다.

한꺼번에 우르르 부모에게 가라고 하면 혼잡하니 이것도 몇 명씩 가족들에게 인도하는 모양새를 취하는갑다 했다.

다 부르고 하는 말이 부모님이 안오신 훈련병을 호명한 거란다.

이게 왠일...

알아보니 일찍 온 부모들은 안내 데스크에서 신분증을 맡기고 군대에서 발급하는 신분증을 받는데 그 신고를 하지 않은 훈련병도 함께 부른 것이다.

난 초보농사꾼 덕에(?)에 늦게 도착했으므로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님이 안오신 것으로 확인되어 아들이 불려나간 거다.

사단은 거기서도 났다.

나야 시키는대로 절차밟아 아들을 데리고 나오면 되지만 나머지 진짜 부모님이 안오신 이 훈련병들 얼굴을 보니 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서둘러 안내 데스크에 가서 신분증을 맡기고 군대 신분증을 중대장에게 보이기 위해 와보니 훈련병들이 서있던 자리에 없고 태양이 워낙 뜨거우니 단상 그늘에 앉혀 놓고 있었다.

신분증을 보여주고 아들의 손을 잡고 데리고 나오는데 그곳에 같이 앉아 있던 훈련병들의 눈이 일제히 나와 선우에게 쏠렸다.

“내가 못살아.”

또 눈물은 내 자신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왔다.

그때는 다른 부모들이 자기 자식 데려가며 안고 웃느라 이번에도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아들이 반가워서 우는갑다 하는 듯..

난 선우만 데려오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맘 같아서는 다 데리고 나가 함께 점심 먹여 들여보내고 싶었다.

아들도, 초보농사꾼도 내가 우는 이유를 잘 알기에 말없이 어깨만 토닥여 주었다.

성격도 이렇게 생겨먹어서 그리워 안달이 난 아들 마음만 눅눅하게 만들었다.

이제 아들 선우를 데리고 꿈같은 4시간을 보내기 위해 군대를 빠져나왔다.

식당을 찾아 돌아다니는 아빠에게 ‘먹는 게 뭐가 중요해요. 아무 데나가서 얼굴보고 얘기해요.“한다.

시간이 아까워 아무 고깃집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까 계급장을 못단 훈련병들 부모가 왔는지부터 물었다.

부대에서도 부모가 아예 못오신다고 신고한 훈련병은 다른 곳에 따로 배치해서 그렇게 기다리게 하지 않게 했단다.

자기 옆에 있는 훈련병들의 부모님도 오신다고 하여 거기에 배치된 것을 안단다.

“그래, 아들아, 그 부모님이 와서 계급장 달아줬어?”했더니 그렇다고 간단히만 말한다.

난 아들이 엄마의 이 마음을 잘 알고 있어서 엄마가 집에 가서도 두고두고 마음 아파할 것임을 알기에 좋은 쪽으로 말한 것인지, 나중에 진짜 부모가 달려와 계급장을 달아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일단 이번 두 가지 일에 온통 신경을 쓰고, 울면 반드시 머리가 아픈 체질이라 이번에도 영낙 없이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들의 훈련소 생활 이야기를 듣고, 그리움에 지쳐 별을 보던 이야기, 동기들이 미쳤다고 ‘상근’이라는 복을 차버리고 현역 지원했느냐고 했다는 이야기 등을 들었다.

우리는 동생 주현이가 오빠를 생각하는 마음과 고3 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소식, 산골의 농사 이야기, 엄마의 꿈이야기 등을 맞교환했다.

아무래도 맞교환이라지만 한쪽으로 치우치는 교환일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훈련병이 되어 자유를 박탈당하고, 자신의 의지대로가 아닌 군의 명령대로만 생활하는 처지이고, 그리움이 살갗까지 파고 들어오면 그것을 떨치면서 밤을 지샜다는 이야기가 더 막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를 더 막중하게 만드는 것은 약을 먹어도 두통이 점점 심해져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티를 안내려고 해도 머리에 손이 갔고 선우의 말에 대꾸도 반에 반밖에 해주지 못했다.

꿈속에서도 애타게 그리던 아들이 코 앞에 있건만 남의 자식들 모습에 맘이 아파 우느라 머리통은 퍼즐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난듯 쑤시는 바람에 꿈같은 시간에 이러고 있다니...

선우의 군생활이야기가 이어졌다.

엄마, 아빠 만날 때 입을 새로 받은 군복을 밤마다 몰래 꺼내 얼마나 입어보았는지 모른단다.

구두도 파리가 낙상하도록 닦고 닦았는데 오늘 연병장에서 먼지에 형편없이 되었다며 웃는 아들의 모습에서 박하향이 났다.

초보농사꾼도 자신의 경험담을 말해주며 용기를 주었으나 난 시키는 말에 대꾸도 못할 정도로 두통과 쌈박질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쉬울 것 없었다.

사람이라면, 어미라면 다른 자식 그런 모습에 반응하는 건 당연했으므로...

이제 헤어질 시간...

아들을 군대에 반납(?)할 시간이 다가왔으므로 무거운 엉덩이를 떼야 했다.

아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셨다.

하늘도 그 마음을 알았는지 밖에는 언제 태양이 있었냐는 듯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또 다시 부대 입구가 보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 헤어짐도 헤어짐이지만 내일 날이 밝으면 이 한 청춘이 국가가 가라고 손짓한 곳으로 가야 한다.

그것은 52사단...

헤어짐에 마음시리고, 다음 날 새벽에 또 다시 낯선 곳으로 길 떠나야 하는 저 청춘의 마음이 어떨까를 생각하니 가슴팍이 뻐근해왔다.

부대에 맡긴 나의 신분증을 받고 아들을 돌려주었다.

인수인계(?)...그 작업이 이렇게 아플줄이야...

아들은 들고 있던 우산을 내게 건네고 훈련병들 사이로 걸어갔다.

몇 명이 채워지자 생활관으로 이동할 차를 기다리는 곳으로 다시 이동시켰다.

이제 아들 모습이 볼펜자루만하게 보인다.

다른 부모들은 돌아가고 나만 서있는다.

아들이 어여 가라고 손짓한다.

내가 꼬마병정처럼 서서 성호를 긋자 그도 따라 성호를 긋는다.

눈나쁜 엄마에게 ‘엄마, 내가 엄마 아들 맞아’하는 표시라도 하는 듯 크게, 크게 아들이 성호를 긋는다.

‘그래, 아들아,

너를 부르는 곳으로 다시 길을 떠나거라.

다만 한 가지, 어디를 가든 몸도, 영혼도 건강해야 한다.

엄마도 약속하마.

건강히 너를 기다린다고....‘

(이 글은 2012년 5월 24일의 글이다)

* 배동분 : 2000년에 울진군 금강송면 쌍전리로 귀농하여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글을 짓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산골살이, 행복한 비움>, <귀거래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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