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내린 봄비로 집에서 멀리로 보이는 통고산의 머리채가 젖은채로 아침인사를 건넨다.

평소에는 ‘나 죽었소’하고 납작 엎드려 있던 개울물이 옹알옹알거리며 흘러간다.

유입량과 방출량의 수위를 조절할 수 있는 다목적 댐처럼 우리 안의 것들도 그렇게 완전 자동으로 그 수위가 조절되면 좋겠다.

미움, 억울함, 분함, 욕심 등의 초당 유입, 유출이 가능하다면 제 명대로 살 사람이 많아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초봄의 생강나무꽃처럼 영롱하고 해맑지 않을까 생각하는 날이다.

 

이웃 마을에 몇 년 전에 귀농한 집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1학년인 아들을 둔 가장은 몇 년 전에 혼자 귀농해서 집짓고 지내고 있다가 어느 전자회사에 다니던 아내가 올 4월에 사표내고 두 아들과 함께 가장이 먼저 둥지를 튼 이곳으로 내려왔다.

혼자서 4년인가를 서울을 오가며 귀농생활을 했던 그 가장의 얼굴에 이제야 생기가 돌고 기름기가 흐른다.

그동안 그의 아내는 도시에서 아이들과 가장 없이 지내느라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귀농한 지금은 머리를 바닥에 대기만 해도 깊은 잠에 빠져들 정도로 숙면을 취하고 두통도 귀농하고 그 텀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며 박꽃처럼 환하게 웃는다.

도시에서 쌓일대로 쌓인 스트레스와 피로가 다 빠져 나가고 몸도, 정신도 정상 궤도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자연’이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은 이곳 울진의 '자연'만한 곳이 어디 있는지...

몸도, 마음도 치유하는 데는 ‘자연’만한 의사가 없다는 것을 귀농 16년차인 난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의 서두르지 않고 자연에 몸을 맡기며 하나하나 적응해 나가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한다.

그런 귀농 여사님에게 복병은 또 있었다.

뭐든 열심히 해보려는 마음이 앞서 ‘그렇게까지 안해도 될 일을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는 거였다.

그 중 하나가 ‘야자수 사건’이다.

그 집 가장이 어느 날,

“형수님, 우리집 야자수 구경하러 안오실래요?” 하며 웃는다.

야자수라니 이게 뭔소리랴?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집 옆에 성냥곽처럼 놓여 있는 하우스 안에 고추를 심었단다.

말라죽을세라 물도 빵빵하게 주고, 흙이불도 두툼하게 덮어주며 심었을 게 뻔하다. 그 꼼꼼한 그 집 가장의 성격에...

그렇게 다 심고 몸살을 견디는(고추든 뭐든 모종을 땅에 꽂고 나면 모종은 새 땅에 적응하느라 비실거리다가 이내 적응을 한다) 것을 지켜 보던 어느날, 그 집 가장이 치과에 정기 치료를 받기 위해 서울로 뜬 것...

물론 나머지 가족은 산골에 둔 채...

사단은 그 때 난 것이다.

남편이 서울로 가면서 고추 밑부분의 이파리를 조금 뜯어주라고 했단다. 그러나 남편이 없을 때, 뭔가 멋진 일을 해내고 싶었겠지. 우리들의 여사님이...

칭찬받을 것을 상상하며 숨이 턱턱 막히는 그 뜨거운 하우스 안에서 고추이파리를 뜯어주기 시작한 것...

고추의 맨 아래 이파리를 뜯어주면 고추가 모든 에너지를 윗부분에 쏟기 때문에 키도 크고 열매도 잘 열린다는 설이 있어 그렇게 하기도 한다.

우리 역시 귀농 초에 그렇게 했으나 별 차도를 느끼지 못한 관계로 그 때 이후 훑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의 여사님은 좀더 무럭무럭 자라라고 이파리를 열과 성을 다해 뜯어주고 싶었겠지.

해서 열심히 하나하나 뜯었단다.

쌈빡하게 일을 끝낸 오여사!

남편이 어서 돌아와 자신의 노동량을 보고 감탄과 고마움과 대견함의 의사표시를 하리라 굳게 믿었을 것이다. 사단이 난지도 모르고...

그러나 서울서 돌아온 남편은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단다.

고추를 그만 영낙 없는 야자수로 만들어 놓은 것.

이파리를 뜯어줘도 너무 뜯어준 것.

위에만 몇 가닥의 이파리를 모자처럼 이고 죽 서있는 고추들...

그 집 남편의 표현대로 우리 부부가 봐도 야자수 같았다. 미니 야자수 ^^

“고추를 야자수를 만들어 놓으면 어떡해? 그 모종은 하나에 500원이나 하는 비싼 오이 고추 모종이라구 ㅠㅠ!!!” 라며 뭉크의 <절규>에서나 봄직한 얼굴로 난감해하는 남편에게

“여보, 어쩌면 야자수 기법이 더 대박 날지도 몰라” 하며 깔깔 웃더란다.

이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가장이 서울로 가고 큰아들이 이가 아파 밤새 앓았단다.

왜 우리더러 응급실 가자고 하지 그랬냐고 하니 진통제 먹고 어찌어찌 견딜만 하다고 해서 그랬단다.

그 대신 내일 아침 일찍 와서 아들을 면까지 데리고 가서 서울행 버스에 태워달란다.

운전을 못하는 여사이니 우리에게 그리 부탁을 한 것...

그런 일이야 당연했다.

초보농사꾼이 아침 일찍 그 마을로 달려가 아들을 데리고 서울가는 버스를 기다렸다가 태워 보냈다.

서울에서는 그 집 가장이 강남터미널로 아들을 데리러 나오고...

치과치료를 서울에서 대대적으로 하던중이라 마저 서울서 진료를 받는 게 낫겠다고 해서 그리 태워 보냈다.

가장이 서울 간 사이 이런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서울서 돌아온 귀농 가장.

우리더러 야자수 구경 많이 하라며 웃는다.

두 사람을 보니 우리의 귀농 초 모습이 퍼즐조각처럼 재구성되었다.

우리라고 별 수 있었는지..

둘 다 직장생활만 하다 농사짓는다고 내려왔으니...

그 집이나 우리 집이나 연고도 없는 이곳 울진으로 귀농했고, 좌충우돌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깨지며 걸어가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우리 집 홈페이지를 보고 이곳으로 귀농할 생각을 굳혔다고 했다.

그런 생각을 굳히는데 권유는커녕 그 사실을 알지도 못했지만 은근히 책임감이 느껴진다.

작은 실수든, 큰 실수든, 작은 역경이든, 큰 역경이든 실망과 좌절에도 전의를 상실하지 않고 용수철처럼 우뚝 다시 서서 사루비아 선홍색 같은 뜨거운 열정으로 자신들이 꿈꿔온 귀농의 길을 잘 가리라 믿는다.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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