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전, 서울에 살 때는 걸음걸이도 빨랐다. 롱다리도 아니면서 빨리 걷자니 얼마나 발이 부지런을 떨어야 했는지는 상상의 몫이다.

삶이 하도 정신없이 돌아가니 하다못해 발도 정신없이 돌아갔던 것이다.

그 걸음걸이로 요란을 떨며 걷다가 아는 사람이라도 눈에 걸리면 잽싸게 온기 없는 미소를 입에 붙이고 고개를 끄덕 한번 하는 것으로 만남은 거의 끝이 난다.

거기에 상대방이 토를 달거나 하면 곧 멱살잡이라도 할 분위기로 돌변할 자세임을 눈치챈 상대방도 나의 보조에 맞추어 간단한 인사로 종을 치기 마련이다.

그렇게까지 시간을 닦달했던 도시생활 속 마음의 뜰이 과연 윤택했는지는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보지 않아도 알 것이다.

새해로 귀농 9년차다.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걷는 것을 즐기는 내 모습에서 스스로 화들짝 놀라는 요즘이다.

도끼눈을 뜨고 앞만 보며 쌩소리 나게 걸었던 내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젠 느려터진 인간이되어 가고 있다.

눈이 많이 와서 어디가 개울이며 어디가 장독대인지 구별이 안갈 정도다. 허리까지 눈이 왔으니 무엇인들 기죽게 하지 않았겠는가.

눈이불을 뒤집어 쓴 개울가에 앉아 귀기울이니 개울이 아는체를 한다. 난 그의 옹알이를 다 귀에 담는다. 작지만 당차고 맑은 소리다.

겨우내 건조해진 내 귀를 소제해 주는 그 소리만으로도 한여름 시원히 흐르던 모습을 눈에 삼삼히 그려낼 수 있다.

백주대낮에 이런 여유를 부리다니 서울 살 때 같았으면 씨도 안 먹힐 일이다. 자연은 사람의 기본과 근성, 가치관까지 단박에 바꿔 놓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녔다.

그대 삶이 팍팍하고 건조하게 돌아가는가. 자연을 오른팔에 끼고 침묵의 시간을 가져보라. 그의 표정 , 그의 언행에 귀기울여보라.

이내 팍팍한 영혼에 새순이 돋고 숲 속 음지의 이끼처럼 촉촉한 기운이 마른 가슴을 적실 것이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봉창두드리는 소리나 아니꼬운 소리 정도로 들릴지 모르지만 어차피 삶은 데미지가 크더라도 내 철학대로 이끌어가는 자만이 종점에 가서는 웃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엄마 손’만큼 용한 의사니까, 모든 것을 치유해 줄 것이다. 그런 믿음이 나를 배신 때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데 9년이 걸렸다.

개울가에서의 공부(?)를 끝내고 돌아서는데 등뒤로 무엇이 후다닥 뛰어간다. 벌써 저 비포장길 끝까지 뛰어간다.

노루다. 눈이 많이 와서 먹이를 찾아 내려온 모양이다. 어여 들어가 초보농사꾼과 그 녀석들의 먹이 상의를 해야겠다.

자연 한 자락에 상의도 없이 들어와 얹혀 살면서 자연을 스승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 그런 나눔은 당연한 일이다. 일종의 등록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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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나만 여유 부린 것이 아니다. 겨울 백수 기간으로 들어선 딸 주현이도 에미 못지 않은 여유를 부리고 있다.

쇼파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책을 보고 있다.통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방해를 하는지 쿠션을 머리에 비스듬한 각도로 이고 앉아 책을 보고 있다.

딸 아이의 모습이 하도 부러워 나도 그를 흉내내며 책 속에 코를 박았다.

(이 글은 2008년 1월에 쓴 글로, 딸은 이제 청춘이 되었다.)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

** 배동분 : 2000년에 울진군 금강송면 쌍전리로 귀농하여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글을 짓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산골살이, 행복한 비움>, <귀거래사>가 있다.

 

배동분 집필위원 sopiab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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