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말하는 인간의 유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한 사람은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길을 가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난 나의 길을 가는 데 어떤 사람의 영향을 가랑비에 옷 젖듯이 받았을까 별만큼이나 손가락을 헤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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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의 일이다.

대학생이 된 딸아이가 1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었다.그 이유는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금강송면 사무소에서 1년 정도 알바를 할 기회가 있어서였다. 그 기회 역시 순전히 딸이 결정한 것임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새학기가 막 시작된 터라 아이는 서울의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계셨던 시기였는데 알바를 구한다는 말에 이미 지불한 2학년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직접 걷우어 들고 단촐한 제 짐을 싸들고 산골로 내려왔다.

그 이유를 물으니 자신의 유럽배낭여행을 가고 싶은데 그 경비를 스스로 벌고 싶었고 한 학기 정도의 등록금은 자신이 번 돈으로 내고 싶었다는 이유가 전부였다.

여행이라는 어마어마한 배는 청춘을 어디로 데려다줄지 알고 있었는듯 청춘이 되고나서 딸은 여행에 많은 에너지를 초집중했다. 내 교육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딸은 그렇게 알바로 번 돈을 모아 유럽배낭여행을 다녀왔다.

내 교육의 모토는 책과 여행, 자연이다.

내가 귀농을 결심한 이유도 아이들에게 자연을 스승으로 삼아주고 싶어서였으니 그것은 맡아놓은 것이고 다음으로 책과 여행에 온 신경을 다 써서 아이들을 키웠다.

귀농하고 어려서부터 가족 모두 기회만 되면 농사로 번 그 알량한 돈을 탈탈 털어 세계의 이 나라 저 나라를 기웃기웃거려본 경력이 있는 아이들은 커서도 그 약발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내 교육은 성공이라고 이 연사 목터지게 외칠 수 있다.

그 결과 딸은 여행 쪽으로 더듬이가 발달하여 길 위에 인생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그런 성장배경을 가진 아이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부모와 대화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고 그것은 우리집 단골풍경이다.

서론이 길었다. 이 날도 하루에 체득한 일들과 감동을 온가족이 앉아 저녁밥을 먹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딸이 먼저 누군가를 침튀겨가며 말했다. 난 음식을 만드느라 제대로 못 듣고 나중에 식탁에 합류해 보니 ‘사람’이야기였다.

딸이 함께 일했던 금강송면사무소 노용성 산업계장님 이야기였다. 말수가 많지 않은 딸 아이의 입에서 방언터지듯 칭찬이 이어졌다.

딸아이의 관찰력은 예리했다.

딸은 1년 가까이 면사무소에서 알바하는 동안 계장님의 선한 심성에 대해서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우리 부부의 귀에 넣어 주었었다.

그러더니 오늘은 점점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노계장님이 인자하신 내면을 가졌다는 것을 차치하고라도 조직에서 조직원들에게 보이는 배려심과 따뜻한 모습을 사례별로 나열했다.

귀찮고 궂은 일은 아예 계장님이 티내지 않고 하시는 것을 여러 번 봤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팀의 리더는 어떠한 모습이어야 팀원들이 힘들지 않은지, 팀웍을 결정하는 것은 팀리더의 스킬과 능력이기 이전에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들이 근간을 이룸을 배울 수 있었단다.

어른들 틈에서 처음으로 일을 배우느라 서툴고 긴장한 자신에게 잘 하고 있다며 늘 용기를 주시고 따뜻하게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분도 노용성계장님이었다고 했다.

딸이 오랜 기간의 알바를 끝내는 바로 그 날, 마침 유럽을 가기 위해 서울로 갔는데 그 큰 짐들을 직접 계장님께서 차에 싣고 버스정거장까지 데려다 주셨다고 했다.

그리고 차표를 끊어 손에 쥐어주셨다는 말을 할 때는 아이 눈이 언 호수에 비친 달빛처럼 반짝거렸다.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계장님께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냈을 때, 계장님이 “너는 최고였다”고 “잘해냈다”고 답장을 주셨을 때의 울컥하는 마음을 잊을 수 없다고도 했다.

딸의 말이 내 귀를 타고 들어와 앉기도 전에 이번에는 자신도 ‘사람’에 대해 할 말이 있다며 서로 약속이나 한듯이 아들이 바통을 이었다.

아들이 침튀기는 사람은 장선용 계장님이었다.

아들 역시 방학 때 금강송면사무소에서 알바를 했기 때문에 그의 말도 경험에서 체득한 것으로 구체적이었다.

힘주어 말하는 톤으로 보아 하루 이틀 스쳐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아니었다.

산골청춘들은 사람을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장점이든 단점이든 신중하고 진지했으며, 그것이 자신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들어와 앉았는지 그 점까지 소상히 부모에게 이야기하는 습관이 있었다.

아들은 장계장님과 외근을 나갔을 때의 일을 몇 번째 언급하는지 모른다.

‘솔선수범’이라는 판에 박힌 말, 이제는 그 세대 아이들에게 ‘박물관’의 박제와 같은 언어 정도로 인식되어지는 세상에 이 사자성어와 장계장님을 관계짓는 아들의 덧붙임은 예리하고 깊었다.

알바하면서, 장계장님과 함께 외근을 나갔었는데, 당연히 알바생에게 시켜야 할 일도 땀을 흘리시며 솔선수범하시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앞으로 사회에 나가 조직생활을 할 때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배웠다고 했다.

또 장계장님이 인상 쓰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잠시 일하다 갈 자신에게도 늘 진지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는 말도 부록처럼 덧붙였다.

아이들의 신바람나는 ‘사람예찬’에 그날 산골의 식사자리는 온기로 들끓었다.

청춘들은 세상을 스폰지처럼 받아들인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러다 삶의 연식이 쌓이면 정수기의 필터처럼 하나하나 걸러서 받아들이고 말이다.

잉크물처럼 파리한 청춘들은 일단 자신의 얄팍하고 깨지기 쉬운 가치관에 튼튼한 뼈대가 될만한 것들을 흡수하고 그것이 빠져나갈세라 예의주시하며 그것을 돌본다.

그런 청춘들에게 있어 이 두 분과의 만남은 청춘들의 가치관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했을지는 두 말하면 입 아플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오래 전의 이야기인데, 농업인과 산업계는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노용성 계장님이 군청으로 발령받아 가셨기 때문에 이제야 이 글을 쓴다.

심리학용어에 잔물결효과(ripple effect)라는 것이 있다.

어느 일부가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하는데 어느 공무원 일부가 전체 공무원의 이미지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나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것을 떠올리는 일이다.

나는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옛말을 좋아한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사람의 향기’는 건조하고 팍팍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 세상의 청춘들에게 대숲에서 부는 바람과 같은 역할을 해줄 것이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떠올리는 잣대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 배동분 : 2000년에 울진군 금강송면 쌍전리로 귀농하여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글을 짓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산골살이, 행복한 비움>, <귀거래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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