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산골 구석 구석까지 자동차 도로가 잘 뚫려져서 산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불과 4~50여년 전만해도 거의 도보로 다니던 시절이라 산길은 주민들과 친숙한 이웃이었다. 울진 읍내에서 신림리(新林里), 대흥리(大興里) 방향으로 다니던 사람들은 가원동(佳原)동을 지나 가파른 ‘도산재, 고갯길 넘어야했는데 이 길도 이곳 사람들에게는 애환과 정담이 넘쳐나는 고갯길이다.

행정구역상 고성리 산 61-3번지인 이 고갯길은 옛날부터 이곳 사람들에게 ‘도산재’라 불리워지고 있는데 혹자는 독산재(獨山), 또는 돌산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1979년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 지명총람’에는 ‘도산재는 기골 서북쪽에서 신림으로 넘어가는 고개‘ 라고 간단히 설명되어있다.

도산재는 읍내리 서쪽에서. 울진읍내리를 굽어 살피는 형국이다. 도산재에 올라가서 울진 읍내 쪽으로 내려다 보면 산 아래로 고성리 구만들이 훤히 내려다 보이며 동해의 일출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도산재 봉우리에는 소나무와 오리나무,아카시아 같은 잡목들이 뒤섞여 자라고 있는데 그 중 가장 높은 언덕배기에 굵은 소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 있다. 나무의 굵기는 가슴높이 직경이 88cm정도이며 300살의 나이답게 아담하지만 든든한 품위가 느껴진다. 소나무가 서 있는 위치가 가장 높은 곳이라 북풍이 무척 센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무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다. 수형은 한 번도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 교목상태로 자라고 있지만 정 2품 소나무와 비슷한 모양을 엿볼수 있다.

이 소나무는 도산재의 정상에서 거친 풍상을 겪으며 울진읍내를 지켜왔다. 산천의 나무들이 땔감으로 모두 베임을 당했을 때도 용케도 살아 남아 울진을 지켰고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도, 6.25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고 서서 울진을 지켜왔다. 그래서 예부터 蔚珍縣을 지켜온 나무라 하여 李鍾赫씨는 ‘縣守松’이라 이름했다. 현장에 가보면 과연 ‘현수송’이란 이름이 아주 적합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주민들은 소나무가 서있는 이 고개를 ‘외솔배기‘라고 부른다. 이 도산재의 ’외솔배기이‘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만남의 장소가 되는 셈이다. 장터에서 돌아올 때도 ’ 먼저 가서 외솔배기에서 기다리게‘ ’외솔배기에서 만나세‘ 하는 말들이 언제나 자연스럽다.

울진 읍내장에 무거운 짐 보따리를 이고 지고 다니던 신림리. 대흥리 방면 주민들은 반드시 이곳 외솔배기에서 쉬어간다. 소나무 밑에 짐 보따리를 벗어놓고 시원한 바람을 마시면서 지친다리를 뻗노라면 정승, 판서가 부럽지 않다. 이 외솔배기는 오만 소문의 진원지로서 뉘집 며누리가 살림을 해푸게 산다느니. 누구네 집 아들이 장가 간다느니, 온갖 정보들이 유통된다. 도산재 외솔배기는 본래 이런 곳이었다.

 

안일왕 산을 울진의 祖山이라한다. 안일왕 산에서 뻗어내란 맥은 세갈래로 갈라지는데 덕구온천 뒷산인 매봉산과 서면 소광리의 통고산, 그리고 백암 온천 뒷산인 백암산이다. 매봉산에서 흘러내린 지맥은 신림리 뒷산인 아구산(蛾口山)을 거처 신림리 비래마을의 뒷산인 진등재로 뻗어내려 도산재~ 고산성~월송공원에 이른다. 월송공원에 모인 기운은 군수 관사로 뻗어내려 울진군청으로 맥이 이어져있다. 그래서 예부터 울진의 가장 명당은 월성공원에서 군청으로 뻗어내린 맥이라고 알려져 왔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울진경찰서를 접수하고 경찰서 앞에 있던 울진군청 청사를 다른 곳으로 옮겨 가도록 강요했다. 일본인들도 이 맥이 명당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울진군청에 근무하던 직원들 중에는 지역을 사랑하고 사명감을 가진 토박이 직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제의 강압에 버티지 못함을 잘 알고 군청사를 경찰서 뒤쪽의 높은 위치로 옮겨 지었다. 오히려 일경들을 감시하는 듯한 위치에 있게 하였다고 한다. 그분들의 기지로 예전보다 더 좋은 명당터로 옮긴것이다.

옛날부터 이 도산재에는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도산재 소나무 밑에 묘를 쓰면 울진이 패망하고, 묘를 쓴 당사자의 가문도 망한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 언제 누군가가 몰래 묘를 썼는데 후에 주민들에게 발각되어 파묘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얼마 전만 해도 파묘한 자리에 돌 무더기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묘를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주민들이 자갈 무덤을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소나무에 최초로 ‘현수송(縣守松)이란 이름은 붙인 사람은 고성리 거주. 이종혁씨이다. 그는 울진에서 대대로 살아온 토박이로 어른들로부터 이 소나무에 얽힌 전설과 이야기들을많이 들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직접 도산재를 넘어 다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소나무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그래서 ’縣守松‘ 이란 제하의 찬시도 지었다. 이제 울진의 미인송이나 대왕송도 명품 소나무이지만 현수송도 또한 울진의 새로운 명품으로 자리매김할 때다. 다행히 울진군에서 보호수 지정 절차를 진행중에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오늘도 현수송은 도산재 외솔배기에서 세찬 비바람을 맞으면서 여전히 울진읍을 지켜주고 있다.(2016. 3.1)

 

 

讚 縣守松

紫松 李鍾赫

後嶺佳原縣守松 가원 뒷동산 골 지킴이 솔이여

후령가원현수송

甲皮駁虎幾過邛 구갑으로 얼룩지며 얼마나 고달팟는가

갑피박호기과공

月城膝下遊靈鳳 월성 슬하에는 신령한 봉황이 놀고

월성슬하유영봉

王避江頭舞瑞龍 왕피천 어귀론 룡이 춤을 췄다네

왕피강두무서룡

旭日邀招銀漢別 일출을 마중하면 은한을 이별하고

욱일요초은한별

終宵省察洞民從 밤새도록 성찰하니 동민이 따르네

종소성찰동민종

長枝屈枉如綾繞 해묵은 가지 구부러져 비단 두른 듯

장지굴왕여릉요

肅氣登天活以胸 숙기 등천하며 가슴속에 사누나

숙기등천활이흉

 

 

* 글쓰는데 도움을 주신 분: 울진뉴스 2015,9월호, 읍내리 강원이발관 대표 김연국씨, 고성리 거주 이종혁씨. 고 임무승씨 및 고성리 주민다수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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