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삶의 위로가 되는 곳, 프라하 카를교

청춘인 딸과 함께 한 유럽 배낭여행[1] 배동분l승인2016.07.07 11:01l조회수11,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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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행을 갈 때마다 “우리는 추방당한 후에야 비로소 그곳이 낙원이었음을 깨닫는다.”는 헤세의 말을 옹알이하며 주섬주섬 서둘러 짐을 싼다.
이번 여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청춘인 딸이 입에서 ‘봄’ 하면 개구리가 튀어나올 것 같은 어느 날, 뜬금없이 전화하여 던진 말 덕분에 울타리를 털고 나서게 되었다.

“엄마, 나 엄마랑 유럽 배낭여행 가고 싶은데, 우리 뜨자.”
딸아이가 자신이 아르바이트하여 번 돈을 개미처럼 모아서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지 채 두 달도 안되어 다시 내지른 말이지만 그 딸에 그 엄마라고 몇 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도 뿜어냈다.

“그래, 우리 뜨자.”
귀농하고 울타리를 훌훌 털고 뜨는 일에 이골이 난 우리 가족이라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살다 2000년에 연고도 없는 경북 울진 오지 산골로 귀농했다.
귀농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 앞으로의 삶은 내 의지대로, 내 페달을 내가 밟으며 느림의 삶을 살자는 거였고,

둘째는 내 아이들은 학원 뺑뺑이질 시키지 않고 자연 그리고 책과 여행을 스승으로 삼아 키우겠다는 이유가 다였다.

나는 한국생산성본부 선임연구원이었고, 남편은 현대자동차 소장이었다.
둘 다 맞지 않은 로또복권 찢어버리듯 사표를 내던지고 미련도 없이 귀농했다.

한 번도 안 해본 농사지만 밀레의 <저녁기도>에 나오는 풍경처럼 경건하게 땅에 엎드려 흙을 일궈 들어온 검소한(?) 수입으로 제일 먼저 가족의 책을 사고, 여행을 떠났다.

아이들을 책과 여행으로 키웠으니 딸이 청춘이 되어서도 바람이 자꾸 부른다며 몽유병 환자처럼 밖으로 밖으로 튕겨져 나갈 구실을 찾는 건 당연했다.

그렇게 키웠으니까.
유럽여행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은 딸과 둘이서 배낭을 메는 일이라 설렜다.

여행은 무언가를 얻고 채우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찌꺼기, 군더더기를 비우고 소독을 하기 위해 떠나는 거다.

이번 유럽여행은 여러 나라를 간 보듯 찍고 다니는 것이 아니고 한 곳에 오래 머물며 그 나라의 풍경이 내게 말을 걸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저 너희들이 나를 위해 있어주는 것이 아니고 여행지와 내가 도반이 되어 두런두런 서로의 풍경을 들어주는 그런 기회를 갖기로 했다.

프라하...
베를린에서 프라하로 가는 길...

베를린이라고 발음하면 나도 모르게 모든 근육까지 경직되곤 했는데 프라하라고 발음만 해도 내 안의 잠자던 세포들이 그 청량한 소리에 일제히 대답을 할 것만 같았다.

우린 프라하에 오래 머물렀다.
딸과 난 블타바 강에 놓인 카를교를 어느 소리에 이끌리듯 가고 또 갔다.
손가락으로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낮에도 가고, 밤에도 가고, 아침에도 가고....

▲ (딸아이는 예술가의 공연이 끝나자 두 손으로 통속에 돈을넣고 고개숙였다.)

카를교는 유럽의 3대 야경으로 꼽힐 정도로 아름다워서 찾는 이유도 있지만 아기자기한 이야기들이 길손을 기다리기 때문에 딸과 나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그곳을 갔다.

다리 위의 조각상들은 그날그날을 근근이 살아내는 우리들을 너른 가슴으로 안아줄 것 같다.

그래서 조각상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여행객들은 자신의 슬픔과 상처를 일러바치는지도 모르겠다.

조각상에 손을 대고 있는 사람들 마다의 표정에서 진지함을 넘어 의식을 치르는 듯한 경건함을 보았으니 말이다.

해 질 녘의 카를교는 “아픔이 있는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며 호객행위를 하는 듯 강물도 소리 없이 최선을 다해 빛나 주고 있었다.

다리 아래의 나룻배들도 믿어도 되는 말이라는 듯 강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고 있었다.

새들까지도....

이성복 시인 말마따나 “우리의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살았지만 카를교 위해서만큼은 우리의 고통과 슬픔이 개별적인 게 아니라 전체적인 거라고 믿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낮에 찾아간 카를교는 왠지 낯설고 부담스러웠다.
어려운 집에 초대된 것처럼....
밤은 그토록 강한 것이었다.

라캉이 말했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실제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빠득빠득 부정하며 살다가 결국 인정하게 만드는 곳이 바로 해질 녘의 카를교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 위에서 떠나지 못하고 돌고 또 돌아 이방인끼리 몇 번씩 마주치는 풍경이 연출되는 곳이기도 하다.

▲ (물 위의 것들은 제 말을 하고 난 내 말을 했지만 우린 다 알아들었다는듯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다리 위의 많은 석상들에게 우리는 각자의 속내를 풀어놓게 된다.

그리고 일 년에 약 1억 명이 방문한다는 카를교의 여행객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옹알이하며 석상이나 동판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빈다.

동판이 반질반질하다 못해 형상이 흐릿해질 정도로...

그중 가장 믿음이 가는지 성 요한 네포무크 조각상은 만지기만 해도 행운이 오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전설로 인해 호객행위를 안 해도 알아서 몰려드는 이들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바츨라프 4세는 아내인 소피아 왕비의 외도를 의심하여 네포무크 신부에게 소피아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명령했다.

▲ (요즘 청춘들에게 희망을....)

그러나 신부가 이를 거절하자 고문을 하고 혀를 잘라 블타바 강에 던졌다지....
이후 네포무크 신부는 성인의 반열에 오르고 성인의 조각상을 만지면 소원을 들어주고 행운이 온다는 전설이 있단다.

딸과 손을 잡고 살을 애는듯한 추위 속에서도 카를교 위를 수도 없이 찾아간 것은 내 안의 울림을 들을 수 있는 곳이고, 그 울림을 어루만질 수 있는 힘까지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딸은 숙소로 돌아와 말했다.
“카를교 위에 서있기만 해도 위안이 되는 것 같아 엄마. “

▲ (할슈타트에서 알았다. 여행은 비운 샘물에 새 물이 고이기를 기다리는 거라고..)

여행은 그런 거다.
내 안의 우물을 들여다 보고 다시 그 우물을 힘차게 퍼올리며 새 물이 고이기를 기다리는 것...

그대의 우물은 새 물이 찰랑이고 있는지????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
** 배동분 : 2000년에 울진군 금강송면 쌍전리로 귀농하여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글을 짓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산골살이, 행복한 비움>, <귀거래사>가 있다.

 


배동분  sopiab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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