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그가 말했다.
“나 겔(Ger) 하나 사고 싶은데...”

나는 겔이 유목 텐트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머리에 바르는 젤인 줄 잘못 알아들었다.

그런데 유목민들이 초원에 치는 그 겔을 말하는 거였다.

순간, 벼락같은 충격을 받았다.
‘이건 뭐지?’

난 17년 전에도 이런 벼락을 맞았었다.
그때도 그는 너무 자연스럽게 “귀농하고 싶은데......”했었다.

그는 현대자동차 소장이었고 그 지역부에서 최연소 소장으로 자신을 길을 빡세게 달리고 있었다.

그런 그가 내뱉은 ‘귀농’이라는 말은 불덩이 같아 주워 담을 수도 없었고, 집어서 내다 버릴 수도 없었다.

난 그의 귀농 이유를 듣고 여러 날 고민을 했다.

그러나 그의 귀농 이유가 마음을 뒤흔들어 놓아 한국생산성본부 선임연구원이라는 나의 이력을 휴지조각 태우듯 불사르고 경북 울진 하고도 오지 산중으로 귀농했다.

귀농해서 모든 수입은 자연에서 땀 흘리며 얻는다는 대명제 아래 땅에 엎드려 빡빡 기면서 농사를 지었고, 끼득끼득거리며 네 식구는 자연에 온전히 잉크물처럼 풀어 살았다.

그러다 알량한 돈이 조금 생겨 콧구멍에 바람 들면 호미 내던지고 한 나라씩 여행을 다녔다.

바람이 손짓하는 곳으로...

그렇게 삶에 길이 들어가고 있을 때, 남편이 내던진 말이라 ‘이 벼락은 또 뭐지?’하는 생각이 섬광 스치듯 스쳐갔다.

남편과 내 인생에서 ‘귀농’ 외에 또 다른 무식 용감한 결정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는데 아니었단 말인가.

암벽등반에, 빙벽등반에, 스킨스쿠버에....
무수히 많은 위험천만한 취미를 갖고 있는 남편이 ‘귀농’이라는 벼락같은 일을 저지르는 것으로 그런 것에 종지부를 찍는 줄 알았던 내가 남편을 잘못 판단한 거였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내용을 들어보니 몽골인들이 초원에 치는 몽골 겔을 사고 싶다는 거였다.

24년 전부터 캠핑을 했던 우리 가족이었기 때문에 요즘 캠핑이 대세이니 뭐 독특한 군용 텐트 같은 것을 말하는가 보다 했다.

그런데 꼭 몽골인들이 치고 사는 진짜 겔을 사고 싶단다.

이쯤 되면 눈치채야 한다.
그의 영혼은 늘 광야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내가 잊고 있었다.

귀농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루어졌으니까.

그의 가슴속 삶에서 “이랴, 이랴!!” 소리가 들려와야 그가 제대로 살고 있다는 신호탄이다. 몽골 겔을 흉내 낸 국산 텐트 같은 것은 싫단다.

난 말리지 않았다.

싸지 않은 가격이어서 고민은 되었지만 그것 역시 말려서 될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것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시킨 일이므로....

몽골 유목민들은 자신을 위해 성을 쌓기보다는 스스로의 나아갈 길을 닦아가야 한다는 철학이 있었던 것 같다.

남편 역시 서울에서 아파트 평수를 넓혀 가고 광나는 차를 타기보다는 남이 가지 않는 길을 닦아 가기 위해 그 당시 아무도 가지 않는 ‘귀농’이라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는지...

여하튼 이 산골 남자는 수소문 끝에 원주인가의 어떤 사람에게 몽골에서 직수입한 겔을 하나도 아니고 두 동이나 사 왔다.

트럭에 그것을 실어 왔는데 이건 둘이 내릴 수도 없는 엄청난 무게와 부피였다.

그때부터 그는 겔을 놓을 기초를 하느라 분주했다.

겔 안에 화로를 놓으려고 했으나 화재가 걱정이 되어 내가 말렸더니 남편은 큰 돌들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무게고 부피였다.

겔을 놓을 자리를 튼튼한 돌로 두르고 그 안은 구들을 놓을 거란다.

농사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쪼개어 오랜 시간 그는 그 작업에 몰두했고, 없는 손재주로 구들을 놓고 기초를 하느라 그 큰 돌을 공깃돌 놀리듯 들었다 놓았다 하는 바람에 허리에 무리가 가서 애를 먹었다.

그러나 그 일을 하는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었고 모공마다 신선한 공기가 들락거리는 듯 보였다.

그의 영혼은 벌써부터 유라시아 대륙을 말을 타고 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몽골 겔 두 동으로 그의 영혼의 신선도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난 생각했다.

드디어 몽골 겔을 설치하는 날, 성당다니는 요셉 형님을 비롯하여 몇 분에게 도움을 청해 네 분이 오셨다.

우리가 도움을 청할 때 이처럼 늘 화답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니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등 따숩게 살 수 있었다.

알다시피 몽골 겔은 생태계의 흐름에 따라 옮겨 다녔던 유목민들의 안식처이기 때문에 신속하게 분해하고 조립할 수 있도록 능률적이고, 철학적이게 고안되어 있었다.

그물망처럼 격자로 되어 있는 외벽과 천정에 고정할 수 있도록 기다란 나무 막대기들을 천장과 외벽에 일일이 고정해야 한다.

하나만 잘못 맞추어지면 전체의 조립이 되지 않는 구조였다.

어렵게 골격이 완성되었고, 이제 외벽에 난방을 하기 위해 양털로 된 펠트를 치기 시작했다.

그 무게가 대단했고, 양털 냄새가 났다.

이제는 눈과 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겉 천막을 쳤다.

하얀 천막에 잉크색으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것은 그냥 멋있으라고 박아놓은 것이 아니라 멀리서 보고도 어느 부족인지 알 수 있도록 자신의 표시를 한 것이라고 했다.

‘초보농사꾼은 전생에 어떤 부족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리고 천창은 열고 닫을 수 있도록 겉의 천과 별도로 네모지게 덮여 있었다.

그 천창으로 별자리를 읽고 어떤 꿈을 꾸려고 했던 것일까. 남편은....

장정 다섯 명이 꼬박 하루를 걸려 몽골 겔 한 동을 완성했다.

이 분들은 늘 자유를 향해 내달리는 남편의 영혼을 위한 협조자였기에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몽골 겔이 산골 한켠에 세워졌다.

그날 밤, 남편은 겔에서 차 한 잔 하자고 했다.

그리고 이 겔을 사고 설치하는 동안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어 고맙다는 말도 말주변 없는 사람이 떠듬거리며 찻잔에 흘렸다.

그 역시 나의 꿈이 목마르지 않도록 늘 물을 준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영혼이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를 늘 주시하는 건 당연했다.

난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늘 신선하기를, 그리하여 그의 꿈에 먼지 않는 일이 없기만을 빌었다.

산골 다락방에서 배 동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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