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글이다)
비가 온다.
아침부터 오는 비가 하도 반가워 마당을 어슬렁거렸다.
한참 기분 째지게 걷고 있는데 발 아래 떨어진 꽃이 가슴 철렁하게 만든다.

봄부터 여름 내내 키만 키우며 나의 애간장을 다 태운 생명이 있었다.
내 키만만 백합 한 그루!!
마을의 대소사를 공지하는 이장님네 스피커처럼 얼마 전부터 동서남북을 향해 꽃을 피웠었다.

꽃밭의 다른 꽃들이 그를 우러러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단 기럭지에서 밀렸으므로...
그렇게 새하얀 얼굴로 산골가족의 가을 기분을 좌지우지하던 백합이 그만 땅에 떨어진 것이다.

사람이든 꽃이든 때가 되면 땅으로 가야 하지만 땅에 떨어진 모습이 너무 생생하다.
금방이라도 툭툭 털고 높다란 자기 자리에 다시 올라가 붙을 것만 같다.
너무 생생하게 소풍길을 접는 것이 섬뜩한 아침이다.

생각해 보면 그럴 필요도 없다.

사람이든, 꽃이든 죽을 때는 꼴이 영 말이 아니게 가는 것이 상식처럼 되다 보니 섬뜩하게 가는 꽃의 대명사격인 능소화 등을 보면 우리는 그렇게 소름돋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가는 길이 말짱한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면서 혹시나 제자리로 올라붙을까 서서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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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내가 좋아하는 고 김점선 화백의 책을 읽었다.
거기에 김 화백은 ‘자뻑은 예술가가 되는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했다.
그 부분을 읽으며 ‘아, 맞아. 이건 내가 생각했던 거랑 똑같잖아’ 하며 내 작은 다락방에서 책상을 쳤다.

김화백은 “나는 그림 그리는 시간보다 내가 그려논 그림을 바라보면서 자뻑하는 시간이 더 길다”고 고백했다.

귀농이 딱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귀농한 것을 보고 시키지도 않은 주판알을 두드린다.

두 사람이 직장생활할 때 받은 연봉이 얼만데 손에 흙 묻히고, 말이 작업복이지 너덜너덜한 거지같은 옷 입고 쉰 땀내 풍기며 얻는 돈이 얼마냐는 거다.

열심히 주판알을 두들겨 보라. 답이 나오는지...
왜 사람들은 손끝에서 현찰이 오고 가야만 그것을 벌었다고 생각할까?

사람이 돈을 밝히는 이유는 뭘까?
그것으로 집, 자동차, 명품옷 등을 삼으로써, 몽땅 끌어안음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 행복은 상대적이라 남들 앞에서만 빛난다.
그러다 보니 돈=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오고 가는 현찰 속에 싹트는 행복’ 뭐 그런 말일 것이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말해, ‘행복’하면 장땡 아닌가?
내가 귀농에 성공했다는 이유는 외형적, 상대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행복을 일일이 주판알을 튕기지 못하니 숫자로도 나타낼 수 없을 뿐이다.

▲ (초보농사꾼과 고딩 아들이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열대어 새끼를 관찰하고 있다.)

귀농 전, 도시 살 때 최대의 고민 중 하나가 아빠와 애들과의 관계였다.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직장생활로 아빠가 워낙 바쁘다 보니 애들이 아빠 얼굴 한 번 보려면 2박 3일 걸렸다.
그러니 애들에게 아빠는 어려운 사람, 이웃집 아저씨 같은 사람이었다.

귀농하고는 아빠와 아이들이 친구가 되었다.
그것은 고딩, 중딩이 될수록 더더욱 진한 가족애를 느낄 정도로의 친구이자, 아빠이자, 멘토이자, 그 이상의 관계(이건 가족도에도 나오지 않는 관계이다)가 된 것이다.

▲ (어둔 밤, 손전등 켜고 두 부자지간이 관찰하고 있는 열대어들...)

귀농이 준 선물이다.
그것을, 이 가슴 터지도록 행복한 것을 돈으로 환산이 될까.

그 다음에 자연이다.
아이들에게 자연은 아이들에게 언제나 같은 잣대로 다가서는 스승이다.
인간처럼 지 기분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 아니고 늘 같은 온도로, 같은 색깔로, 같은 결로 다가서는 스승 말이다.

▲ (초보농사꾼과 고딩 아들은 열대어 어미가 새끼를 잡아먹는다며 뜰채로 새끼를 떠내고 있다.)

언제 봐도 그 모습인 별을 보면 사람이 변함없어야 함을 배우고,
새초롬했다가, 만삭이 되었다 하는 달을 보며 아이들은 ‘채움과 비움‘에 대해 배우고,
철철이 소리 소문 없이 피는 꽃들을 보며 침묵과 때를 가릴 줄 아는 지혜를 배우고,
산골 옆으로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말하기 보다는 듣기를 배로 해야 함을 배우고,
봄이면 노오란 송홧가루까지 날려주는 센쓰까지 지닌 소나무를 보면서 늘 푸르른 꿈을 안고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가라는 삶의 철학을 배운다.

이걸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돈으로 환산할 수 없으니 이건 행복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 있는가.
생각할수록 복에 겨운 삶이다.
그렇기에 귀농이야말로 자뻑해야 한다는 거다.

귀농하여 얻은 가족간의 사랑에 소름끼치도록 뻑 가야 하고, 병풍처럼 둘러쳐진 자연의 혜택과 가르침에 뿅 가야 한다.

자뻑하는 삶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기에 ‘귀농’은 촌철살인의 한 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귀농한 사람이 스스로 뻑 가지 않고 도시에서처럼 돈으로 우열을 가리려 든다면 당장 보따리 싸서 되돌아 가야 한다. 뭐든 돈으로 환산되는 회색의 세상으로...

고딩인 아들 선우와 초보농사꾼이 서로 팔을 베개 삼아 주고 하더니 우당탕 난리가 아니다.
끌어 안고 ...
귀농 전 같았으면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모습이다.
부부가 다 직장생활하느라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출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귀농은 자뻑하는 삶이라 아름다운 것이다.
(이 글은 아들이 고딩이었던 2009년 8월의 글이다.)

** 배동분 : 2000년에 울진군 금강송면 쌍전리로 귀농하여 낮에는 농사를 짓고, 가공에 힘쓰고 있으며, 밤에는 글을 짓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산골살이, 행복한 비움>, <귀거래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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