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는 고추보식을 하나도 안했다. 죽은 놈이 거의 없어서이다. 그래도 다들 그러려니 했는데 이웃에 귀농하신 분 댁은 보식하느라 정신이 없으셨다. `힘드시겠구나'하고 생각은 했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우리 산골에도 보식의 붐이 일어 그 붐을 안탈 수 있겠는가? 고추모종에 문제가 있어 그 모종만 깡그리 죽었다. 근 삼천종이 넘는다고 하는데 아직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팔자에 없는 선거일 조금 도와주느라 며칠 산골일을 접었기 때문에 초보농사꾼의 한숨소리만 들었을 뿐 그리 사태가 심각한 줄은 몰랐다. 왠걸! 보식하자며 올라가자기에 경운기 타고 우리 골을 감상하며 올라갔다. "그동안 산골 많이 변했네'' 해도 초보농사꾼 답이 없다.
올라가보니 기가 막혔다. 거의 윗 밭은 다 보식해야 하는 상황.  그나마 서울에서 대학생 조카들이 잠시 내려와 보식하고 시험 때문에 서둘러 서울로 가고 남은 것이 그것이라는 거다. 하나 하나 죽은 놈 뽑아내고 물을 주고 고추심기를 진종일 해도 표도 안난다.
보식은 처음 심는 것보다 몇 갑절 힘든 작업이다. 처음 고추심을 때에는 물주는 기계로 구멍뚫고 물주고를 동시에 한다. 그런데 보식할 때는 재래식으로 해야 한다. 일일이 주전자 들고 저 위 샘에서 물을 길어다 그 넓고 가파른 밭에 구멍을 손으로 뚫고 주전자 주둥이를 들이대고 물을 줘야 한다.
초보농사꾼은 물담당. 한참을 그리하더니 담배만 피워문다. 어쩌다 이리 되었느냐니 모종이 문제가 있어 모종 판 이웃분에게 와서 보라고 했단다. 변상해달라는 말이 아니라 어찌되어 이리 되었는지 알아야겠고 사태를 그 분도 봐야할 것 같기에 그리했단다. 그러나 안하니만 못하다는 말을 하며 담배연기를 하늘로 흩뿌린다. 심기를 잘못심어 그렇다는둥, 물이 난 밭이라 드렇다는둥...
심기는 일손을 사서 이틀에 걸쳐 여러 모종을 다 심었다. 그러니 그 모종만 죽을리는 만무다. 또 물이 난 밭에도 고추는 심었으나 다른 데서 가져온 모종은 물이 난 밭에서도 검으티티한 것이 잘도 자라고 있다.
사람은 `천냥빚' 차원의 것을 바라고 산다. 물질적인 배상보다는 서로 안스러워 하는 마음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초보농사꾼의 생각은 우리가 고집하는 것이 유기농이고, 전 재배농지의 유기재배품질인증을 받았기 때문에 어찌하여 모종이 그리되었는지 알아야 한다는 거였다.
하지만 본인만 속이 타들어가지 상대방이야 어디 그런가.
보식을 해도 해도 끝이 안보이니 힘이 더 든다. 나야 사흘째지만 초보농사꾼은 몇 며칠째인가. 한낮에도 엎드려 있으려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다리도 아프고, 같은 작업을 반복하니 저녁에는 만삭 때의 몸놀림 딱 그것이다.
어제 올라가면서 보식을 끝내고 내려오려니 며칠 전에 힘이 없어 뽑을까 말까 망설이던 것이 기어코 산골을 떠났다. 보식하고 돌아서면 또 떠나니 끝이 어딘지 나도 모를 일이다.
오늘까지 보식하고 그만 하자고 했다. 힘이 들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만 매달리는 동안 풀이 너무 자라 `저 푸른 초원 위에'를 연상케하고 있다. 이 때 풀을 잡아주지 않으면 고추가 애를 먹는다. 또 말목도 박아주고 줄을 쳐주어야 바람에 부러지거나 쓰러지지 않는다. 이 많은 고추에 말목을 박는 일이란...
그러니 멀쩡한 고추도 때를 놓치면 이것도 저것도 다 일이 안될 판이기에 그만 하자고 했다. 초보농사꾼 머리만 끄덕일 뿐 말이 없다.
저녁이 되어 가는 데도 진척이 없자 초보농사꾼이 산골농부 2세들을 불러온다. 한 놈은 모종 놓아주고, 한 놈은 주전자 들고 물주고, 산골부부는 심고....
저녁에 어둠 속으로 경운기타고 내려오는데 바람이 산골의 네 식구를 감싸안는다. "엄마, 달이 벌써 나왔어요.'' 모두 하늘을 본다. "어, 진짜네. 우리 주현이 넘어질까봐 불을 켜두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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