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태풍이 무사히 지나감을 안도하며 잠시 비개인 하늘을 휘 둘러본 것 뿐인 시간이 경과했는데 다시 비가 온다. 산골농사는 비보다는 가물어야 그나마 농사가 된다는 이웃 어른의 말씀이 떠올라 간사한 마음은 어느새 `가뭄'편에 냉큼 줄을 선다.
지난 비로 논둑 한 귀통이가 몸체에서 떨어져 나갔는데 그 상처에 다시 비를 때리니, 이번 비에 또 논둑이 터져나갈까봐 시선이 자꾸 논으로 간다. 초보농사꾼, 이번에는 논둑을 완벽하게 보호한다는 굳은 의지로 장마를 맞이하더니 입가에는 벌써 근심이 덕지 덕지 붙어 이내 입 양끝에 추가 하나 매달릴 것만 같다.

   
몇 달 전의 일이다. 아는 의사분께서 당신 연구소(농약중독연구소) 사이트에 자살하겠다는 사람이 늘어 고민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의 말을 전해줄 수 없냐는 부탁을 내게 해 오셨다. 한참을 고민했다. 평소 존경하던 분이라 그 분의 농약환자에 대한 애착과 노력, 공을 생각하면 그쯤이야 일도 아니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나만큼 손바닥 들여다보듯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내 삶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겠다는 사람에 견주어 과연 긍정적이었고, 충실했고, 거울을 닦았을 때의 마음처럼 `스스로 들여다봄에 맑았는가'하는 잡념 때문에 못들은척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밭에 나가 일을 하면서도 어느 결론에도 이르지 못하면서 애만 탔다. 의사선생님의 간곡한 부탁이 더 낯뜨거워 수건으로 얼굴을 깊게 가리우고 밭일을 해댔었다.
그리 한참 자신을 닥달하고 나니 가슴에서 덜커덩거림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실 인간이 인간을 위로한다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일이고 상대방을 더 번뇌하게 만드는 일인가? 그러나 그 물음의 끄나풀을 조금씩 풀어보니 그 안에서 작은 울림을 들을 수 있었다. 나 자신과 상대방을 별개의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서로 이마에 씌워진 고뇌의 흔적을 함께 지워야 한다는 생각과 사람과 서로 부대껴야 각자의 몸에 난 종기를 서로 털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번갈아 떠올랐다 사라졌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한 번 저지르기가 어렵지 한두 번 하다보면 이내 인이 배겨 일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결국 대들었다.
사람이 삶을 포기할 때는 그래도 누군가에게 작은 손떨림을 전하고 싶은가 보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힘들었고, 더 감강할 자신이 없고... 그래서 되풀이되는 고통의 굴레에서 빠져 나오고 싶은 충동... 등 그 분 사이트에 그런 사연들이 심심잖게 올라오는 것을 보니 말이다. 또 사람은 그럴 때 자신의 속내를 누군가에게 드러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언어의 기교로 더 일을 그릇칠 생각도 없고 다만 지금까지 내 번뇌와 비교해 나의 옛 심경을 토해내는 마음으로 그 사람들과 사이트에서 마주 앉게 되었다. 어젯밤도 새벽까지 그리 마주 앉은 사람이 있었다. 단번에 먹고 죽을 수 있는 약이 무어냐는 물음으로 시작되는 급박한 사연...
도시같았으면 번지르한 말이 앞섰을 것이다. 하지만 산골에서는 가슴이 앞선다. 산골에 낯선 손님이 찾아온 것처럼 마주 앉아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저 내 경험과 생각과 삶의 흐름을 토해내다보니 진실이 곳곳에서 서로 나오려 아우성치기도 했다.
겨우내 벌거벗겨진 나무를 보며 `저게 봄에 싹을 돋울까?'하고 중얼거린다. 하지만 그 중얼거림의 메아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봄을 맞이하면서 신생아 손톱조각만한 싹을 내밀 때 머지 않아 열매가 열림을 예상한다. 그 예상이 희망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이 어떤 기준(지금까지 형태지워진)에 의해 판단하지만 미래에 그 판단이 맞을 확률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 못한다. 불확실하다는 거다. 그래서 사람은 희망을 갖는다.
희망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나의 긍정적인 도전이며 열망이다. 지금보다 더 나으리라는 욕망으로 한걸음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 속의 요동인 것이다. 누구나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진정코 희망을 갖고 사는 이는 드물다. 과거의 굴레와 현재의 모양에 온 정신을 쏟아붓기 때문이다. 그렇듯 스스로 `이 세상과의 마지막'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런 `희망'을 갖길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했다. 소용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날은 밝았다. 부디 같은 아침을 맞이 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귀농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도시에서는 욕심을 키우며 살았지만 산골에서는 희망을 일구며 산다. 현재의 산골형상에 온 정신을 쏟아붓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씨뿌릴 자세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가 잠시 그쳤다. 이제 서서히 일어나 비에 두둘겨 맞아 부러지고 쓰러진 고추를 일으켜 세워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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