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에 비가 여러 날 오니 오두막 주위의 변화에 둔해진다. 밖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오두막에서 지내는 시간이 전부이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우산을 쓰고 장독대가 걱정이 되어 가보았다. 언저리에 달맞이꽃이 피어있다. 그리도 비바람부는 날이 계속되었건만 제 때에 꽃을 피운거다. 그리 기특할 수가 없다. 달을 향해 목을 길게 길게 빼다 그만 키가 그리 멋없이 커버렸건만 그래도 더 가까이 가려고 또 목을 뺀다. 한동안 나도 비를 맞으며 달맞이꽃을 눈에 넣는다.

오늘은 잠시 비개인 틈을 타 하우스 안에 잡초를 뽑았다. 잘 뽑히기는한데 흙먼지 때문에 숨쉬기조차 어렵다. 반 이상을 뽑고 있는데 초보농사꾼이 소리 소리지른다. 아마 여러 번 부른 모양이다. 빗소리가 하우스를 요란하게 때리니 그 안에서는 왠만한 소리는 인간안테나로 감지하기 쉽지 않다.

   

혹여 길이 어찌되었나? 아님 다쳤나하는 생각에 호미를 내던지고 나가보았다. 부르다 대답이 없자 뛰어올라온 초보농사꾼. 길이 더 유실되기 전에 돌로 메꾸어야 한다며 간 사람이 왜이럴까?

"선우엄마, 손님오셨어.''
올사람이 없었다.식구들도 다 뜨고, 홈페이지에 마실오시는 분들 중에도 온다는 내용이 없었다. 서둘러내려갔다. 오두막 앞에 세워진 최고급 승용차에서 내린 사람은 나이가 40대 후반 정도? 말쑥한 외모에서 도시에서 잘나가고 있는 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겉모습으로 잘지내는 사람이라는 판단말이다. 도시 사람들이야 겉에서 보기에 어디 힘들어 보이는 모습의 사람이 흔하던가? 나 또한 그 부류의 사람이었지만 속내를 털고나면 삶의 무게가 뚝뚝 떨어지곤 하지 않았는가?

서로 어색한 인사를 했다. 그 때까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있었는 줄 몰랐는데 손님의 시선이 자꾸 머물러 수건을 벗었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오라 해도 마루가 좋단다. 비가 와서 좀 서늘하다해도 마루에 앉아 먼 산만 둘러본다.

서먹 서먹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디서, 어떻게 오게 되었느냐는 물음을 꺼낼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초보농사꾼과 난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미안합니다. 불쑥나타나서...''라고 말머리를 끄집어는 냈는데 또 시간이 흐른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데....'' 순간 사업실패로 갑자기 도망온 사람쯤으로 단번에 판단을 했다.

오두막에 살다보니 시간의 흐름에 대해 간혹 무딜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 때다. 그저 세 사람 마주 앉아 각자 비구경만 한다. 지금이 대화중이고 잠시 말이 끊어졌다는 어색한 분위기는 어디에도 없다. 잘다듬어진 억양으로 미끄러지듯 사정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업의 성공으로 거의 전부를 얻었단다. 높은 사회적 지위, 그 위치에 있는 친구들, 돈... 막말로 돈, 명예 다 움켜 쥐었다는 얘기였다. 다만 언어사용을 극히 제한적으로 나열했을 뿐이지.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초보농사꾼 "잘되었네요. 여행다니세요?'' 순진한 사람. 가만히 있으면 될일을. 나처럼.
"여행요?''하며 웃는다. 입은 헤벌어졌는데 입가에서 떨어지는 건 소리없는 을씨년스러움. "아니요. 지금도 사업은 잘되고 있어요. 그런데...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요? 앞으로만 나갈수록 이제 그만 뒷걸음질치고 싶은 불안감과 더 나가야 한다는 안달이 어찌나 사람을 괴롭히는지요. 이제는 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오늘도 중요한 회의가 있는 날인데 이곳으로 왔어요. 오면서 강가에 앉아 돌도 던져보고.. 그래서 오두막까지 오는데 7시간이나 걸렸어요. 두분처럼 다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말 중간 중간 구멍난 벽지를 본다. 자유롭게 살고 있지 못한 난 화들짝 놀라 괜시리 호들갑이다. "오두막이 어수선하지요? 고치지 못해 이러니 걱정이랍니다'' 나 역시 가만히 있으면 2등이라도 할걸. 오버했다.

"아니요, 아니요. 이런 집하면 노인분 모습이 떠오르는데 젊은 사람들이 이리 살고 있으니 신선해보여서 그래요. 사실입니다''
고급 양복에 넥타이는 매지 않고, 구두를 신고 온 모습이 계획하고 온 것같진 않아 보였다. "이곳은 우연히 사이트 검색중 알게 되었어요. 새벽에 두 시간 동안 산골 글들을 거의 다 읽고 곧바로 이곳으로 향했어요. 하늘마음 사이트를 알게 된 것이 저에게는 행운이었어요.''

또 침묵이 흐른다. "여기 오길 너무 잘했어요. 이리 가슴이 뚫린 적이 도시에서는 없었어요. 그 구멍을 소유욕, 성취욕이 꽉 막고 있었나 봅니다. 다음에 또 와도 될런지...''
저녁먹고 구들방에서 하루 자고 가라 했다. 그러면 다음에 못오니 구들방에는 다음에 오면 꼭 재워달라며 차를 몰고 산골을 빠져나간다.

차가 안보일 때까지 산골부부 눈을 차 끝에 달아두었다.
사람은 누구나 주연이길 바란다. 나도 주연이길 바랬다. 도시에서는. 그래서 몸도 마음도 고단했다. 산골에서는 조연이어도 감지덕지 하고 살아야 하지만 그 수준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것 같다. 한 중간쯤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려니 가랑이가 째질 지경이다.

욕심을 다 버리지 못한 까닭이다. 반은 버리고 반은 옆구리에 챙겨두고 야금야금 세상을 갉아먹는다. 그것을 땅에 내려놓아야 하지만 아직은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함을 고백한다.

그래서 마음을 자꾸 닦아야 한다고 자신에게 주문을 외운다. 그 주문이 먹힐 때보다는 꽝될 때가 더 많지만. 그래도 도시의 그 찌든 때를 벗기려면 멀었다. 그 뿐인가. 산골에서도 때가 묻는다. 그러니 과거를 닦으랴, 현재를 닦으랴 밴댕이같은 속이 여간 바쁘지 않다. 가끔은 쉬고 싶다. 하지만 끊임없이 닦지 않으면 더덕이가 져 나중에는 닦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게 두려워 닦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그게 두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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