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신고도 없이 목숨을 거둔 고추 때문에 우울한 날이 계속되었다.
아무리 마음을 돌려먹으려 해도 제어장치가 내 손에서 떠난지 오래다. 보다 못한 구름이 나를 고통에서 깨워 오두막 발치에 있는 개울로 데리고 간다. 그리 언성을 높이고 흐르더니만 산골의 분위기 파악을 했는지 소프라노도 아니고, 알토도 아니고, 중간음 메조로 한 구석을 지키고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책에서 "이 물처럼 나의 본성이 고요하기를. 그러나 나의 본성이 물만큼 그렇게 순수하지 못하므로, 물 속에 비친 것 역시 그렇게 뚜렷하지 않다''고 했듯이 나 또한 작은 냇물에 비친 내 모습이 불만스럽다.

귀농할 때 오두막을 고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들어왔다.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만 사셨기 때문에 오두막 구조가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비오면 그 비가 바로 마루까지 들이치는 일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결국 처마에 나무를 덧대어 함석을 올리는 가적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우선 비가 안들이치니 신발이 젖지 않아 좋았다.
그리 가적을 만들고 남은 나무를 마루 한켠에 쌓아두었다. 어느 날 그곳에 도마뱀이 나타났다. 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청소년 도마뱀쯤으로 보였다. 어쩌다 지나가는 이방인이겠거니 하고 흘려 버렸다. 그러나 잊을만 하면 나타나 툇마루를 휘 돌다 나무더미로 돌아가곤 하는 거였다.
도마뱀은 뱀과는 달리 왠만큼 사람이 접근해도 도망가질 않는다. 뱀은 싫어하지만 사람을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고, 사람에게 해꼬지도 하지 않는 도마뱀은 겁나는 존재는 아니었다. 내게 있어 그것은 큰 발전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집게를 들어 멀리로 내몰았겠지만 산골에서 정붙이려 용을 쓰는 내 사정을 생각하다보니 생명붙은 것을 그리 박절하게 못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이들도 그 놈이 귀여웠는지, 나처럼 그런 마음이 작용했는지 잘 따라다니며 함께 놀더니 `또롱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하루는 `또롱이'가 액자 사이를 지나다 선우가 세워둔 액자를 건드리는 바람에 꼬리가 잘린 것. 그러다보니 `또롱이'를 구별하기가 더 쉬워졌다. 하지만 선우는 자기 때문에 그것이 불구가 되었다고 괴로워했다. 그렇게 그는 한 식구가 되어갔다.
어느 날 마루를 새로 만들게 되었다. 가적하고 남은 나무도 모두 치우고 그곳에 더 큰 마루가 깔렸다. 새로 마루가 깔린 후 `또롱이'는 보이지 않았다. 구석 구석을 아무리 뒤져도, 마루를 쿵쿵거리며 불러도 대답이 없다. 괜시리 `또롱이'의 아지트(나무쌓아 놓았던 곳)를 치워 버려 식구 하나를 잃었다는 생각을 하니 세상일이라는 것이 다 좋을 수만은 없나보다 싶었다. 꼬리가 잘려나가 아이들에게는 더 애틋한 모양이었다.
비가 오면 어디서 비를 피하는지 궁금해 하다가 겨울이 되었다. 추운 겨울이니 집 안의 마루로 올지도 모른다는 실같은 기대감으로 구석 구석 뒤졌지만 결국 `또롱이'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전 마루에 도마뱀이 나타났다. 덩치도 `또롱이'만 하고 다른 것은 꼬리가 제대로 붙어있다는 것 뿐. 산골아이들 좋아라 하더니 꼬리가 긴 것이 그가 아니라며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도마뱀의 꼬리는 잘리면 또 나는거야. 그러니 `또롱이'일지도 몰라''
듣고보니 수긍이 가는지 이내 잃었던 `또롱이'를 찾았다며 쫒아다닌다. 창문 틈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질 않나, 아이들 신발 속에 들어가 놀질 않나, 여간 귀여운 짓을 하는게 아니다. 그 하는 짓이 예전의 `또롱이'임에 틀림이 없다.
아이들이 왠만큼 건들기 전에는 도망도 안간다. 이제 새로운 마루 어딘가에 둥지를 튼 것이 분명했다. 다음에 마루의 레이아웃이 바뀌면 제일 먼저 `또롱이'에게 사정얘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어디서 자리텃을 했는지...
저나 나나 자리텃하는 것은 닮았구나 생각하며 액자 뒤로 `또롱이'가 등장하기를 오늘도 아이들과 기다리고 있는중이다.

나는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산골로 와서는 더욱 정이 가는 단어가 되었다. 그것은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뜻이다. 지금은 비록 회색도시의 흥건한 이기심이 배어있겠지만 작은 잎새, 대추나무에서 웅웅거리는 벌떼, 또롱이, 나무 위의 딱따구리들과 몸을 부대끼며 살다보면 어느 새 그 이기심에도 자연의 물이 들 것이다.
그리되면 지금까지 움켜쥐고 있던 자만, 편견, 이기심은 땅바닥에 매어꼿고 노을 저편에 있는 관용과 사랑을 지게에 지고 산을 내려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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