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가고 나니 이어서 가을바람이 산골로 들이닥쳤다.
계절이 바뀔라치면 하다 못해 전주곡이라도 울려 주고 메인 게임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여름의 끝자락을 붙잡고는 마무리를 하려는 순간도 주지 않고 그답 가을바람이 산골을 차지해 버린 거다. 그러니 여름 끝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사람으로 치자면 좀 덜떨어진 사람처럼 어정쩡한 날이 계속되고 있다.


모든 것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에 이골이 난 산골식구들도 가을티를 내려하지만 산골풍경은 한 박자가 늦다. 사실은 늦는 것이 아니라, 음계처럼 제박자대로 자연의 시간이 관리되어지는 거다.
그러다 보니 무늬만 가을이지 현상은 늦여름 모습이다. 익지 않은 대추며, 아직도 처녀 젖가슴만한 파란 호박이며, 패지 않은 벼며... 사람이든 자연이든 박자에 맞게 돌아가야 그 때깔도 좋다.


작년의 일이다.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재래식 보물단지의 내용물을 밭에 뿌려야 한다고 벼르더니 그 날 그 일을 한다고 했다. `똥에서 멀수록 병원과 가까워진다'는 똥철학을 가지고 있던 초보농사꾼.


마침 그 날은 이웃집에서 함께 일하기로 했기 때문에 난 아침에 오두막을 비웠다. 그 때만 해도 산골에 초보농사꾼 혼자 두고 산골을 비우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 보편적으로 실과 바늘이 함께 노는 편이지만 그 날은 달랐다.
오후가 되어 머리끝이 자꾸만 산골에 남아있는 초보농사꾼 쪽으로 향했다. 전화를 해보았다. 왜 집에 와 있느냐는 말에 경운기가 굴렀다는 거였다. 말의 톤으로나 억양으로나 침착한 것 같아 큰 일은 없나보다 하고 세 사람 부지런히 산골로 가보았다.


   
초보농사꾼이 데리고 간 곳은 저 윗밭 그러니까 호수밭하고도 작은 개울 쪽 언덕. 참 광경이... 똥, 오줌이 꽃가루 날리듯 사방에 흩어져 있고 경운기는 급경사 개울 쪽에 거북이처럼 뒤집어져 바동거리고 있었다.
얼마 전에 건축자재 파는 곳에서 거저 얻었다며 좋아라한 낡은 노란 물통은 경운기보다 더 멀리뛰기를 잘해 개울 나무더미에 걸려 있었다. 초보농사꾼이 굳이 침튀겨가며 말하지 않아도 필름이 처음부터 돌아가고 있었다.


말인즉, 도시의 개인주택 옥상에 거의 필수로 부착된 커다란 물통을 경운기에 묶고 이전 주인때부터 차곡차곡 쌓아둔 재래식 화장실의 내용물을 퍼 넣었단다. 한 통 가득 싣고 쇠고기를 먹은 사람처럼 든든한 마음으로 밭으로, 밭으로 행진. 언덕을 지나 사다리 세워놓은 것처럼 경사가 심한 호수밭으로 올라갔겠지. 가슴도 따라 출렁이며...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곳은 위로 향한 경사도 심하지만 개울로 향한 경사는 더 심한 마의 지대. 거기서 경운기 뒤의 샛노란 통이 주책없이 기우뚱거리기 시작하자 경운기도 따라 흔들리더니만 개울가 쪽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것.
초보농사꾼 경운기의 무서움을 귀농하고 귀에 딱지 앉도록 들은 터라 겁이 나더란다. 순간 그리도 좋아하는 암벽 등반할 때 옆 바위로 뛰어다니던 실력을 발휘하여 체조선수 착지하듯 한다는 것이 그만 착지 실패로 경운기, 똥통과 함께 구른 것. 다만 세 박자가 달랐을 뿐... 다음은 굳이 잉크 낭비해 가며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마음 넓은 산골아낙이니 자세히 묘사할 의무가 내겐 있다.


결국 경운기는 경운기대로 몇 바퀴 굴러 개울로 떨어지기 직전에 행동을 멈추었고, 샛노란 똥통은 초보농사꾼의 마음만큼이나 다 부서져 그래도 몸집 큰 파편은 개울 잡목에 턱 걸린 것.
사방이 지뢰밭이고 그 와중에 동요가사처럼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경운기를 혼자 어찌해보려니 택도 아니더란다. 함께 간 이웃 부부, 물 구경하듯 한동안 말없이 내려다보더니 그저 초보농사꾼 크게 다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네 사람이 지뢰밭에서 경운기를 간신히 세워 사륜구동 화물차에 묶은 다음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워낙 경사가 심한데다 조금만 옆으로 각도를 달리하면 개울로 직행할 판이니 초긴장. 그 때 생각하면 지금도 그 두 분께 고맙다.


한참을 실갱이하여 꺼내고 나니 그제야 초보농사꾼의 얼굴색이 정상인으로 돌아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올해. 선우, 주현이가 내용물이 다 찼다며 천연덕스럽게 애비에게 똥을 퍼달라고 주문하기를 몇 며칠. 고민하던 초보농사꾼 이제는 아예 이웃집에서 통과 지게를 빌려왔다. 논을 밭으로 갈아놓은 곳이 내용물의 타깃(target).


양동이만한 두 통에 퍼 담아 지어 나르려니 성질 급한 초보농사꾼 끝이 안 보인단다. 순간 머릿속으로는 그 샛노란 통이 번뜩였으리... 어깨 양쪽의 중심과 양동이 내용물의 차질 없는 양과 배 힘의 균등분배라는 그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작업을 진종일 하는 거였다.
그리고 화장실을 들여다보니 눈금이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다음 날도 진종일 퍼 나르는 초보농사꾼.


어깨가 다 벗겨진 것을 보여주며 이틀 이상은 `인간지게의 한계'라는 결론을 내리고 작업을 마무리했다.
통을 깨끗이 씻어 논 언저리에 해바라기를 시켜 놓고는 낫을 들고 논둑으로 간다. 산골아이들 힘차게 용무 볼 때 튀지 않도록 풀을 베어 넣어줘야 한다며...

달이 밝다. 혼자가 아니라 오랜만에 조무래기들도 주욱 데리고 마실 나와 있으니 머리가 든든하다. 달은 머리 위에서 넓디한 얼굴을 내밀 때보다는 산마루에서 떠오르는 모습이 훨씬 가슴 뭉클하게 한다. 달은 똥만큼이나 생명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가을을 타는 나로서는 산골에서 달이 유일한 가을 놀잇감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바다의 달돋이를 보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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