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없는 날 밭에서 일하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에도 물기가 말라 허기를 느낀다. 잠시 오두막으로 내려와 냉수 한 대접 들이키니 지금이 겨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산으로 도망을 갔던 닭들이 돈이 떨어졌는지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더군다나 암수가 나란히 야반도주, 아니 대낮도주(닭은 야맹증이 있으니..)를 했으니 내 눈이 더 뒤집힐 수 밖에... 돌아오고 나니 그리 고마울 수가 없다.
모이를 주고는 생색내려는 듯 먹는 모습을 한참 내려다 본다. 지난번 집나온 닭과는 달리 마루에 올라 와 있는대로 똥으로 도배하는 법도 없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자기 귀염을 자기가 받는다고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들이나 나나 겨울을 잘 나야 할텐데....

요즘은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 잠자는 것을 거들어주고 싶다.
도시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산골살이에 익숙해지려고 기를 쓰다보니 자기 전에 아이들과의 시간을 되찾기가 쉽지 않다. 도시에서는 철저히 자기 전에 하루의 학교생활도 이야기하고, 책도 읽어주곤 했다.


그러나 산골에 와서는 더 열심히 열을 올릴 것 같았는데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그런 자신을 닥달하느라 잠을 설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침에 아이들이 애비 차를 타고 비포장길을 나서면 `오늘은 예전처럼 자기 전에 책도 읽어주고....해야지'하고 마음 다잡아먹는 소리가 아까 밭에서 내려와 냉수마실 때 나는 소리같다.


눈길을 끊고 돌아서서 하루 일이 시작되고 아이들이 돌아올 때까지도 그 일을 붙잡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난들 그러고 싶을까마는 그 모양새로 있을 때 학교에서 돌아온 산골아이들 얼굴과 맞닥뜨리면 가슴에서 아이쿠하는 소리가 자판기 캔음료 떨어지듯 튀어나온다.


오늘도 주현이가 먼저 나타나 인사를 하고, 그 때 고개를 들어보면 비포장길 중간쯤에서 날 잡아잡슈하며 어그적 어그적 선우가 걸어오고 있다.
어서 나머지 일을 하고 아이들과 배드민턴 한 게임 붙기 위해 이 몸으로 날아다니는데 걷는 비닐은 잘 안걷히고, 난데없이 망치소리가 걷힌다. 김장독 묻어 놓은 곳으로 인간 안테나를 작동시키자 발도 전자동으로 따라 움직인다


선우와 주현이가 무언가 나무에 열심히 못을 박고 있다. "뭐하니?'' "엄마, 우리 눈썰매만든다. 눈감고 있기다.'' 한톤이 높다. 보아하니 이제 초판경기든데 눈감고 있기는 무슨 눈.
그래도 어디 그런가.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기왕이면 입술도 풍선주둥이 오무리듯 하고 있는데 하던 밭일이 자꾸 머리를 잡아당긴다.


주현이는 선우보다 예리하기 때문에 눈감기 동작을 무너뜨리면 뒷수습하는 것이 더 골머리 아프다. 그러니 한동안 그러고 있을 수밖에.
주현이가 못을 찾으러 간 사이, 밭에 가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엄마, 비닐 좀 주세요.'' 선우는 무슨 대목수인양 말도 없이 못만 꽁꽝 박고 있고, 아마도 주현이는 어울리지 않게 지오빠 시키는대로 조수노릇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눈감고 있어주지 못한 마음에 얼른 넓디한 사료포대를 꺼내 주었더니 바로 그거라며 환호성을 지른다.


낮에 아무리 포근한 날이었어도 저녁나절은 등이 시리도록 산골은 춥다. 게다가 겉옷도 입지 않고 지에미 털신은 왜그리 신고다니는지 바꿔 신자니 자기들도 털신을 사달라고 툴툴거리며 따스하게 뎁혀놓은 털신을 양보하고 슬리퍼를 신는다.


   
날이 어둑어둑하여 내 일도 끝이 났다. 그 때까지 망치소리와 두런 두런 설계를 고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산골아이들의 겨울준비는 끝이 안난 모양이다. 어두워졌으니 그만 하고 내일 하자고 했다. 다 만들기는 했는데 핸들처럼 손잡이를 못만들었단다.


손잡이는 혹여 타고 내려가다가 앞으로 넘어질 때 워험하니 그것은 생략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엄만, 핸들 없는 차가 어딨어?'' 일어서서 손을 터는데 보니 바닥에 비닐을 깔고, 그 위에 지들 엉덩이 닿는 곳은 나무로 얽기설기 댄 것이 제법이었다.
"내일은 뒤에라도 핸들을 만들거야''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모양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고집이 세고, 끈질긴 주현이만 말을 할뿐 선우는 그답 말도 없이 어깨를 으슥거리며 방으로 들어간다.


눈이 오길 얼마나 기다렸으면 저리 준비를 할까. 지에미는 밭일때문에 눈이 안오기를 간절히 바라는지도 모르고 아이들의 눈타령은 오늘도 산골 하늘을 찌르고 있다. 올해는 얼마나 겨울백수 때 뻐근하게 놀려고 저러는지....

아이들이 너무 팬팬이 노는 것 같아 주일에 문제집이라도 하나씩 사주려고 아는 서점에 들렀다. 공부도 공부려니와 엉덩이 붙이고 진득이 앉아있는 연습을 해야 했기에 그 명분으로 들어갔다. 산골식구들을 잘 아는 분이라 그냥 챙겨주셨다.


`너희들 오늘부터 앉아있는 연습 시작이다.' 에미의 흑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쉬운듯 썰매를 놓고 들어가는 아이들 뒤통수에다 대고 문제집 3장씩만 풀으라니 나자빠지려 한다. 설명을 해주었다.


이것이 많은 것이 아니고 네가 얼마나 정신을 집중해서 그 시간만큼은 거기에 몰입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거라고 거창하게 의미도 부여해 주었다. 도시같았으면 쨉도 아닌데...
선우는 얼추 알아듣는 모양인데, 주현이는 몰입이 뭐냐는둥 거창이 뭐냐는둥 벌써 잔뜩 골이나 있다. 내일은 뒤에 핸들을 만든다고 하니 각목을 하나 알맞은 것으로 찾아놔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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