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숫물 떨어지는 소리에 솔솔 재미를 붙였다.  요즘.
예전에는 비 오면,  당연히 떨어지는 소리로 쯤 생각하고 잠시 `귓길'을 주면 그만이었는데 요즘은 눈길을 끊고, 귓길만 열어두니  겨우내 건조한 가슴에 한결 생기를 돋게 한다.


우리는 일순간 보는 것으로 기쁨을 찾고, 쉽게 이해하는 것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그 때문인지 듣기보다는 말하는 것에 더 익숙하다. 그러다 처음 귀만 어찌 사용해 보려니 감정이 예전만 못했다.


모든 것에는 연습이 필요하고, 그 맛에 길들여지는 과정이 있듯이 `귓길' 또한 그런 것임을 겨울이 끝나는 마당에 터득하게 되었다.
이제는 듣는 연습을 많이 하여 눈감고 가슴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자신의 소리를 듣는 일에 치중하고 싶다.


   
산골에 와서 `외도'를 좀 했었다.
산골 살림살이가 힘들어서가 아니구, 그저 귀농 전에 하던 일이었기에, 또 전공 관련 일이라서 그 원고 일을 계속 했었다.


산골로 몸뚱아리를 옮겨 놓고 보니 마음이 따라주지 못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하던 일을 놓고 갑자기 환경이 바뀌었다고 호미와 낫을 들고 밭에 진종일 엎드려 있는 일이 익숙하지는 못했다. 귀농 초반이라 생각하며 어수선한 마음을 서서히 정리하기 위해서는 우선 귀농 전에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귀농 전 하던 일을 한동안 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일이 강의였다.

직장 다닐 때부터  강의는 했었다. 수원의 삼성전자, BC카드, KPC 공개강좌 등 여직원 대상 강의였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 두고도, 귀농을 하고도 몇 차례 강의를 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한 회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작년에 강의를 간 적이 있는 곳으로, 신입 여직원 대상 강의라고 했다.
우선 강의 목차를 보내달라고...
한 달에 두 번 환경단체모임 때문에 서울을 가니 그 때로 일정을 잡기로 하고 강의목차를 보내주었다.


그 후 이메일이 하나 배달되었다.
강의목차 밑에 강의내용의 방향을 임의로 적은 것이었다. 말이 방향이지 요구사항 수준이라는 쪽에 가까운...
분명한 것은  회사의 관리자들 머리가 깨어있을수록 여직원 강의라 하여 특별난 주문을 하지 않는다.


그런 곳의 여직원들은 강의 듣는 자세도 다르다. 등황색 원추리꽃처럼 생기 있고, 자신감 있고 적극적인 태도로 듣는다.
그러나 그 회사의 관리자들 생각이 진부할수록 여직원들 말 잘 듣게 강의해 달라는둥, 여직원들이 근무시간에 땡땡이 안치게 해달라는둥 그런 되지도 않는 주문을 해댄다.


물론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하고 내 의지대로 강의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교육담당자가 슬그머니 그런 주문을 강의 원고 밑에  흘리기에 그 때 말했다.
"여직원이라 하여 차별적인 교육내용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직원교육이지 굳이 여직원이기 때문에 그런 의식교육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 쪽에서 없었던 일로 하자고 했다.
그러고 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여직원, 남직원 구별을 요즘에도 해야 하다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사실 따지고 보면 여직원들 또한 강한 직업의식을 갖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동시에 되짚어 보아야 한다.
직장을 결혼할 때까지 그저 거쳐가는 곳으로 쯤 여겨서야 되겠는가. 이는 강한 직업의식을 갖고, 전공을 계속 연구하며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여직원에게까지 먹칠을 하는 일이다.


어쩌면 잘된 일이다 싶다.
어차피 처음 낯선 곳으로 둥지를 옮겨 앉고 이곳에 마음을 내려놓을 때까지 원고, 강의 일을 하다가 내 새로운 전공(김매기, 야콘심기, 야콘캐기, 고추심고 따기 등)에 익숙해지면 `외도'를 그만두려고 했었으니 그만 둘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난 모양이다.
이제부터는 산골관련이나 귀농관련 `외도'가 아니면 여직원 강의는 그만두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이 길이 나의 길이 되었고, 나의 꿈도 이 길 위에 있음을 진작 인식했어야 옳았다. 그동안의 강의원고며 노트며 강의도구를 다 분리수거하고 들어왔다.
손을 털면서 이리 물건은 분리수거를 끝냈는데 마음은 귀농 전과 귀농 후를 칼같이 분리수거한 것인지....


오두막에 구들방이 하나 있다.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도 계속 사용했었는데 그만 구들이 탈이 났었다. 구들하면 한 구들 하신다는 이웃 어르신을 모셔다 새로 구들을 놓았었다.


그리고 한동안 효자 노릇을 잘 했는데 시간에 반비례하여 연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견딜만 했는데 지금은 전국적으로 연기가 새어 들어와 그만 사용을 중지했다.
오늘은 아궁이 옆을 비질하는데 작은 고무래가 볼썽사납게 나뒹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구들이 제구실을 못하니 너도 그리 천덕꾸러기 신세구나 하는 생각에 남아있던 아궁이의 재를 쳐냈다.


군불을 지필 생각에서가 아니라 귓밥이 낀 것처럼 답답하여 쳐냈더니 고래가 훤해졌다.
이내 내 마음의 잡티도 쳐낸 듯 속이 깔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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