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홧가루 날리던 황홀한 시절이 지나니 그리 허전할 수가 없다. 자연은 그래도 인정스러워 그 한숨소리를 찔레나무가 받아준다.

제 몸에 난 가시를 감추려고 하얀 손을 내밀며 제 몸의 향기까지 싸잡아 내 시선을 끌려하지만 솔직히 은은한 파스텔톤의 송홧가루만 어림없다.

   
그나마 찔레꽃이 제 갈길을 가고나면 그 뒤를 이을 군번은 누군지 조급증이 난다. 아마도 앵두와 오디가 아닐런지.

지 차례가 오기 전에 서둘러 제 몸뚱아리를 익히고 있는 모습에서 사람의 모습을 본다.
신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을 손바닥에 알사탕 쥐어주듯 했지만 자신의 영혼을 익히기 위해 그 시간을 곶감 빼먹듯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기야 지금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꿰맬대로 꿰매 응급처치해 놓은 지친 내 영혼이나 돌볼 일이다.


사람이 무엇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길들여진다는 건 생각없이 당연히 그래해야 되는 것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 멜라뮤트(일명 썰매끄는 개)도 밖의 수도에서 물소리가 나면 늑대소리를 내며 짖는다. 남편이 제 밥을 주기 전에 꼭 물을 길어다 주었기 때문이다.

개집을 집 가까이에서 멀리로 옮겼는데도 그 행동은 여전하다. 하물며 사람이야.
오늘은 우리가 결혼한지 13년째 되는 날이다. 도시에서야 이쯤이면 며칠 전부터 각자 잔머리 굴리기에 바빴다.

눈치껏 제 속셈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미리부터 이미지관리, 표정관리, 분위기관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루 전 날, 선물에 눈이 멀어 슬쩍 `욕구'를 풍기면 거의 대부분은 미끼에 걸려들었고, 서로의 주머니 사정에 관계없이 그 욕구를 충족시키며 째져하곤 했다.

그러나 이곳 산골에서는 뻔한 상황에서 며칠 전부터 잔머리싸움을 할 일도 없으니 뱃속편하다. 단지 남편이 이 산골로 온 후 과연 그 날을 기억할까만이 궁금했었다.

오늘은 고추줄을 매어 주기로 한 날이라 계획대로 고추줄을 넣은 배낭을 하나씩 등에 붙이고 줄을 띄웠다.

워낙 더운 날이라 `오늘이 그 날'이라는 기억도 오락가락할 정도였다. 내가 이 정신인데 아무 생각없는 남편이야 오죽하랴는 떨떠름한 기분을 고추줄에 올려놓고, 그럴수록 지줏대 하나마다 강한 `도시의 인습'을 떨치려 용을 쓰고 있을 때였다.
남편이 저 쪽에서 매던 끈을 놓고 오기에 담배 한 대 피우려나 보다 했다.

"선우엄마, 축하해. 달리 줄 것도 없네'' 하며 쑥스럽게 내미는 것이 있었다. 하얀 개망초꽃
평소에 하도 흐드러지게 피기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는데 하얗고 작은 것이 향기도 그윽했다. 도시에서의 그 어떤 선물이 이에 비길까?

남편은 마음이 야물지 못한 아내의 얼굴에 흐르는 속내를 읽으려고 애쓰는 표정이다.
하얀 선물을 들고 잠시 서있었다. 감정이 제 갈길을  찾지 못하고 해맨 탓에...
우리 둘은 밭고랑에 앉았다. 그러자 축하공연이 시작되었다.

해님은 조명을 맡았고, 구름은 소품담당, 나무와 바람은 음향담당. 고추잠자리와 나비가 춤을 추더니 이름 한 번 불러 주지 못한 새들도 제 목청껏 노래를 불러 주었다. 무대를 장식한 꽃들은 향기뿜기에 나만큼  땀을 흘리고 있다. 자신에게 아주 엄격한 밭가의 작은 냇물도 한 목소리한다.

난 눈가에 흐르는 하얀 물을 훔치며 주위를 둘러본다. 나도 나의 고마운 친구들에게 답가를 불렀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부는 벌판에 서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도시에서는 지금 이 시각쯤이면 아파트에 빤한 메뉴인 꽃바구니와 케익, 판에 박힌 카드가 배달되었을테지만  그런 것은 없어도 내마음의 구석진 부분까지 읽어주는 산골친구들이 있으니 쇠고기를 먹은 것처럼 든든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정말 신의 선물이 배달되었다. 4시경에 비포장도로에 어김없이 나타
나는 나의 산골 아이들.
지에미, 애비가 집에 안보이자 장화로 갈아신고(뱀에 대한 세뇌교육이 철저하여...) 밭으로 직행한 결혼기념 선물을 끌어 안았다. 축하공연하느라 비지땀을 흘린 친구들도 같이 등을 토닥인다. 남편은 선물도 배달되었으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잔다. 하늘, 바람, 구름도 등을 떠민다. 뭣도 모르는 아이들은 좋아라 고추잠자리 앞세우고 오두막으로 향한다.

남편은 산골 오두막에 촛불을 켜고 주현이에게  축하곡을 부탁했다. 귀농 전 피아니스트가 꿈이라며 열심히 피아노를 배우다 산골로 내려온 후 배움을 중지한 주현이는 밑천이 별로 없는 것이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아는게 `징글벨' 외에 몇 곡이 전 재산. 산골에 울려퍼지는 여름밤의 `징글벨'소리...

사람이 무엇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서운 일만은 아니다. 난 이리 익숙해질 것이기 때문에....


일상이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어수선한 곳에서나, 적막하기 그지 없는 산골에서나 마음만 청정하면 밖으로부터의 덜그럭거리는 소리는 스폰지처럼 모두 흡수할 수 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어디에 집착을 하고 ,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내 삶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마음이 가리키는대로 사느냐가 중요함을 이제, 이제  느낀다.

지금 쌉쌀한 향기가 짙은 머위가 통치마를 펼치고 앉아있는 산골에서 내 마음은 지금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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