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아이들과 봉숭아물을 들였다. 선우는 왕발톱에, 주현이는 새끼 손가락에. 욕심많은 에미는 이런 데서도 티가 난다. 양손 도합 여섯 손가락.

   
어두운 밤에  염소똥만한 것을 손톱 위에 올려놓고 서로의 것을 묶어준다. 그 묶는 마음엔 내일이면 곱디 고운 빛으로 물들리라는 무지개빛 기대감이 참견했으리.
다음 날 개봉해 보니 아이들과 내 손가락의 땟깔이 사뭇다르다. 아이들 것은 곱고 진하게 일률적으로 들었는데, 내 것은 흐릿한 것이 약발이 신통치 않았다.

아이들은 스폰지같은 여린 마음이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흡수했지만, 에미는 집착하는 삶을 살아와서 무딜대로 무디어진 손톱이 어떤 것인들 순수히 받아들였을까 싶었다.
나도 이제 집착에서 벗어나면 무딘 마음도 스폰지처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런지...


산골에 와서 안 일 중 하나는 선우가 호기심이 아주 많다는 사실이다.
귀농 전에는 시키는 일이나 하던 아이였다. 아무리 놀이터에서 재미있게 놀다가도 내가 베란다에서 부르면 그답 뛰어들어오는 아이. 처음엔 그것이 교육이 잘된줄 알고 좋아했다. 에미가 모자라서...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건 애답지 못한 행동이라는 사실에 내 얼마나 답답함을 느꼈던가? 그러나 도시에서 달리 방도가 있나.
주말이면 자연으로, 자연으로 체력, 정신단련을 위해 텐트치고 장작피우고 뒹구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귀농.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는 선우. 초보농사꾼도 호기심많기로는 둘째는 억울하다는 사람. 호기심많은 박씨끼리...
귀농 전,  길을 가다가도 일단 길가에 두 사람 이상만 모여있으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인지 들여다보고 가야 한다.

새로운 등산 장비나 기계가 나오면 아주 궁금하다. 손재주도 없으면서... 음식도 어떤 특이한 것이 있으면 일단 먹어봐야 한다. 음식을 전혀 안가리고 해주는대로 잘 먹는 성격하고는 또 다른 호기심...

그런 극도의 호기심으로 귀농을 한 것일게다. 모르면 몰라도...
그 초보농사꾼이 오늘은 선우를 데리고 세레스 운전연수를 시키는 것. 정말 말리고 싶었다.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이고 게다가 그곳은 바닥만 평평하지 논해먹던 자리이기 때문에 조금만 이탈하면 그답 저 아랫 논이 부르는 그런 위치. 또 차 뒤 길가쪽으로는 작년 루사 때 완전히 분화구가 생긴 곳이 있어 여차하면 차량과 함께 멱감아야 하는 곳. 이쯤되면 내 속만 탄다.

말려도 호기심많은 부자가 그만둘 리가 없다. 한참을 세워서 가르치고, 가면서 가르치고... 선우는 겁난 얼굴을 하더니 이내 좋아죽겠는 표정이다.
`한참을 밭일을 하고 와서 저 사람이 왜 저러는지... 더위 먹었나??'
하지만 호기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이상한 행동이 전혀 아니다. 어쩜 좀 늦은 감이 있다. 논을 몇 바퀴 돌았을까. 그 와중에 후진까지 한다.

안되겠다 싶어 내려가 한 마디 하지만 어디 멜라뮤트 짖는 소리쯤으로 듣는 두 박씨.
포기하고 들어오려 "이제 좀 쉬었으니 나 밭에 간다''하며 다시 밭으로 올라가는 초보농사꾼.

세레스에서 내리는 선우의 목에 힘이 바짝 들어가 바람만 불어도 곧 부러질 것만 같다. "선우야, 너 잘하더라. 기분이 어때?'' "엄마, 운전이 말이예요. 힘들어요. 엄마도 세레스 배워보세요. 내일은 후진연습을 더 해야겠어요.''

아마 모르면 몰라도 선우는 이 짧은 순간에 여러가지 경험을 했을 것이다. 겁도 났을 것이고, 자기가 조금만 딴 눈 팔면 저 아래 논으로 직행한다는 사실도 배웠고, 알려준대로 안하다간 옆의 코치에게 된통 혼날 것이고, 조심성도 배우고, 자신감 주머니도 엄청 커졌으리...
도시에서야 대부분 주부만이 아이를 키운다. 사실 애비가 아이들 맨 정신으로 얼굴보는데 2박3일 걸리는 판이니... 우리 집만 그랬나??) 교육이었다면 이런 과감한 일이 있을 수나 있겠는지.

또 산골에 와서도 초보농사꾼이나 하니깐 저 짓을 하는 것이겠지 싶었다.
아이의 마음과 생각과 육체는 저리 깊어가는 것이리...
인도의 영적 스승인 오쇼 라즈니쉬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어야 할 것은 오직 자각뿐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깨어있는 의식을 갖도록 도와주는 일이 전부라고...

그리고 아이들에게 "깨어있으라. 그리고 자유롭게 움직여라. 실수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상심하지 말아라. 삶은 실수를 통해서 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이니 무서워 하지도 마라''고 마음에 심어주라고...

그 말이 이 순간 내 귀를 더 세게 와서 두드린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 오늘은 두 기사를 위해 얼큰한 매운탕을 끓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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