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하고 달라진 일 중 하나가 간이 커졌다는 거다. 웬만한 일은 일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고상하게 얘기하면 긍정적인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고 하겠고, 막말로는 간뎅이가 부은 것이다.
추석 모습까지 찍는다고 서울까지 함께간 MBC촬영팀과 헤어져 산골로 향하는데 영주쯤 오니 태풍 매미에 대한 격앙된 보도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순간 작년에 대인 가슴에 다시 화기가 오른다.

   
새벽 2시경에 울진을 통과한다는데... 태풍 매미는 전야제도 화려하여 시키지도 않았는데 산골의 잡동사니를 밭으로 날라다 놓았다. 그나마 오래된 집에 가작 하나 내어 달았는데 이번엔 그것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가작이 날아가면 지붕은 덤으로 날아갈 판.
어두운 비바람 속에 갤로퍼를 가작에 묶는 초보농사꾼과 산골소년. 삽을 들고 집 주위를 순찰한다.

물길도 내어주고 제일 무서운 산사태를 걱정하여 산도 살핀다. 뭘 알고 살피는지, 모르고 살피는지 손전등들고 따라다니는 아들과 이런 저런 상의도 해가며...
지금 산골이 비바람에 심상치 않음을 알고 따라다니는 선우는 가슴이 한 치는 컸으리라.


새벽 2시가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 오늘따라 아이들은 잠도 안잔다. 지들도 우리 산골이 겁나게 돌아가는지 아는 눈치다.
그러자 초보농사꾼 그런 아이들의 불안한 마음을 희석시켜 주려고 씨름 한판 붙잔다. 웃통 벗고 박씨 일가가 들러붙기 시작했다. 좁은 흙방이 금새 뚫려 나갈듯 태풍의 소리보다 더 크게 고함을 치며 시간을 번다.

서울의 시어머님이 울며 전화로 당부하신다. 산사태가 무서우니 산에서 제일 먼 부엌방에서 다 모여 자라고...
15평 오두막이 거기가 거기겠지만 효도한다는(벌써 귀농하면서 불효는 시작되었지만) 맘으로 그 좁은 방에 얼기설기 네 식구가  눕는다.

아이들은 씨름의 후유증으로 자고 산골 부부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드세지는 빗줄기와 바람만큼 마음의 중심을 잃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더듬어본다.

어디가 강이고, 숲이며, 어디가 바다인지 알 도리가 없다. 발을 디뎌봐야 알지만 쉽게 발이 디밀어지질 않음을 안다.
선우책이 바깥 마루에서 비바람에 젖어 몸서리를 쳐도 나가지 못했다. 너무나 삼킬듯이 달려들어서... 비바람이...

날이 밝으면 세상은 드러나는 법. 여름내 기죽어있던 작은 내는 다 파헤쳐져 강이 되어 언성을 높이고 있었고, 그 곁에 세워둔 세레스는 길이 쓸려가는 바람에 곧 개울로 몸을 던질 자세.
고구마밭이 매몰되고, 논 가장자기가 잘려나가고, 하우스 둑이 무너져 간당간당... 전기, 전화 물은 셋트로 멈추었고...

초보농사꾼 그답 답운재밭을 다녀와서는 애궂은 200원짜리 솔담배만 못살게군다. 답운재 땅이 쓸러내려가고, 매몰되고, 고추밭은 물에 잠기고...


요즘 사람들은 중요시여기는 부분이 너무 많다. 건강도 중요하고, 지위와 돈도 중요하고, 자식 새끼가 공부도 잘해야 하고... 그러나 세상 일이라는 것이 양손에 떡을 다 쥐게 하는가?
가장 귀히 여기는 것 하나만 충족되면 한쪽의 떡은 포기해야 하지만 어디 그런가.
말로는 건강이 제일이라고 하지만 그러면서 한쪽의 떡을 포기하려드는 사람은 그다지 없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던가.
"한번 태어난 것은 밤이나 낮이나 제 목숨 스스로 깎으면서 가나니 그 목숨 차츰차츰 줄어드는 것 가뭄에 잦아드는 논물같네.''
산사태로 온가족 매몰될 것을 그리도 걱정했던 난 날이 밝아 펼쳐진 상황에는 초연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양손에 떡을 다 쥘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은 생각에서 오는 것.
하나 하나 복구하고 고치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목숨은 어디 그런가.
행복이란 눈으로 보여지는 것으로 느낄 수도 있지만, 마음의 뜰에서 꽃을 피움으로써 느끼는 것이 곰삭은 행복이리라.

전자는 거의 내 의지대로 안되는 부분이 많지만, 후자는 내 의지대로 가능하다.
이제 산골 여기 저기에서 보여지는 것은 이미 내게 주어진 일.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이겨내는가가 삶의 길목에서 매듭을 하나하나 지어가는 일이라 생각한다.

내 산골로 와서 맑디 맑은 매듭은 몇 개나 지어놓았는지를 세어보고 싶은 날이다.

저작권자 © 울진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