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눈을 들어보니 가을이 저만치서 제 몸단장을 하고 있다.

성큼성큼 오는 것이 아니라 세월의 무게를 지고 옴인지 여간 더딘 게 아니다. 자연은 그리 서둘지 않는다. 그 뿐인가. 자신의 일부인 사람에게 표내지 않고 닥아온다. 태풍으로 온갖 것들이 떠내려 갔어도 때는 속일 수 없는 것.
사람도 저리 "때의 순환''을 인식하고 산다면 , 단순하게 그리고 안이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을텐데...


태풍 매미가 울진을 지나간다는 방송을 들었을 때,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새끼줄을 엮어 옆구리로 밀어내듯 지나온 삶이 꾸역꾸역 옆구리에서 삐져나왔다.
그 날을 바람과 함께 뜬 눈으로 새우고 날이 밝자 그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모습이란... 이웃집이 통째로 떠내려 가고, 산사태로 일가족이 매몰되고...길, 전화, 전기... 그리고 넋나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전화가 며칠만에 연결되어 산골가족이 살아있음을 서울 가족들에게 숨가쁘게 전화하는 중에 걸려온 전화 한 통.
동해안으로 해서 울진으로 가을여행중이라고... TV에서 보았는데 꼭 가보고 싶다고... 그래서 이쪽으로의 여행이 가당치 않음을 주절 주절 설명했다. 그러나 돈내고 숙식할테니 신세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도 덤으로 들려온다.

다시 사정을 했다. 길사정을 얘기했고, 이웃들의 집이 떠내려감을 얘기했고, 그리고 사람이 그리 죽어나감도 얘기했는데 알아들었는지 못알아들었는지...
전화를 끊고나니 수해입었을 때보다 가슴이 더 덜컹거린다. 겨울날 문고리 흔들리듯 제멋대로 쇳소리를 내며 가슴을 친다.

다음 날, 차타고 가야 하는 답운재밭의 수해난 몰골을 보고 막 들어오니 사람다녀간 흔적이 있다.

잠그고 다니는 대문도 , 꼴난 문잠금쇠도 없으니 누군든 들어올 수 있는 오두막이지만 주인은 작은 흔적도 알 수 있다. 싸리문처럼 걸어둔 반쪽짜리 문도 열렸고... 누굴까? 전화가 왔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는지 자주 전화가 끊긴다. 아마도 불영계곡을 돌아가는중인가보다. 여하튼 내용을 모자이크해 보니 어제 여행 운운한 사람들이 다녀간 것.
집구경하고, 개구경하고, 잘 둘러보고 간다고, 저 윗밭까지 가보았는데 담배잎처럼 생긴 것이 야콘이냐고... 거기까지 좋았는데 캐보았더니 신기하더라. 하나도 안가져 왔으니 걱정말란다...

아무리 나만 좋으면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다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사정 얘기를 들은 초보농사꾼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화를 서둘러 낀다. 서둘러 호수밭으로 가보니 야콘 몇 주를 뽑아 놓았고, 그 아래의 고구마도 몇 덩어리 캐놓은 것... 덜 자란 야콘과 고구마를 보니... 쩨쩨하게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야콘은 지금 한창 자라는 시기이고, 고구마도 아직 이른 시기... 고구마나 야콘을 헤집어 놓으면 멧돼지의 습격을 받기 십상이다. 그리 한 번 맛을 들이면 다 캐먹을 때까지 나타난다는 멧돼지... 저번에 멧돼지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는 가슴이 다시 움츠러든다.

덜자란 야콘과 고구마를 옷 앞자락에 감싸안고 내려오는데... 인큐베이터가 있으면 넣어주고 싶은 심정.

나의 작은 호기심이 다른 사람의 생명줄,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왜 모르는 것일까. 일년 내내 비가 많이 와서 속이 건포도가 되도록 키워낸 것을....
알몸으로 서본적이 있는가??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알몸으로...

저작권자 © 울진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