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호는 아침, 저녁 햇살의 밝기도 다르지만, 아침, 저녁으로 들려오는 새소리도 사뭇 다르다.
아침에는 지들도 아이들을 깨우느라 분주한지 그 음의 길이가 짧다.

그러나 오후 들면서 들려오는 새소리에는 여운이 있을 정도로 장음이다.
그것은 아마도 아침에 산골아이들을 학교 보내야 하는 내 마음이 분주하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차가운 유리문이 아니라, 한지만이 주는 나무처럼 거칠고 따뜻한 양면이 우리네 삶과 다르지 않기에 요즘 현대인들이 창호문에 환장을 하는지도 모른다.


100년만에 폭설이 내렸다고 전국이 떠들썩했다. 그러나 산골에서는 해마다 그 이상으로 천연덕스럽게 눈이 내렸기 때문에 이번에도 눈이 쌓이는 정도에 따라 하나, 둘 사태수습에 돌입했다.

우선은 차를 저 아래 다리 결에 내려다 놓은 일이고, 하우스에 내려앉은 눈을 작대기로 계속 쓸어내리는 일이다.
숙달된 경험에 의해(그래봤자, 귀농 4년차이지만) 수순을 밟고 있었다. 예년에는 허리까지 눈이 오고 오두막 식구들이 고립돼도 휴교령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전국사태라는 이름을 달다보니 이 정도로 얼떨결에 휴교령이 산골학교에도 내려졌다.

일일 백수가 된 것이다. 그러니 신이 난건 산골아이들.
올겨울은 유난히 눈이 안와서 눈썰매탈 생각도 못하는 줄 알았는데 거기다가 휴교령까지 내렸으니 복 터졌다고 자빠진다. 본전은 빼야겠지...

어둡도록 제일 난코스에서 썰매를 타다 와서도 모자라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썰매를 타러 나선 아이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주현이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오빠가 눈썰매를 타다 개울로 굴러 떨어졌다는 것.

   
초보농사꾼 상황 파악하러 다녀오더니 안되겠단다. 결국 병원으로 가기로 결정했으나 문제는 차를 다리 결에 내려다 놓았기 때문에 서지도 못하는 선우를 어찌 데리고 가냐는 거였다.

주현이의 아이디어로 눈썰매에 선우를 태우고 차까지 끌고 갔다.
국도 중간 중간이 빙판이 되었고, 그 험한 불영계곡을 곡예 하듯 돌고 돌아 병원에 도착해 X-ray를 찍었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고 근육이 놀랐으니 한동안 통증이 있을 거라고 했다.

도시에서 같았으면 다쳤다고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다친 것이야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것이고, 저 놈들이 이 사건도 추억꺼리로 가슴에 접었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주사 맞고 붕대 감고 다시 돌아가려니 긴장한 탓에 산골가족 모두 여간 허기를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산골아이들이 기분 째져하는 메뉴인 오뎅, 호떡, 떡볶이를 샀고, 차 안에서 그답 먹는줄 알았다.

그러나 초보농사꾼 그래도 불영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먹자며 차를 몰고 계곡쪽으로 간다. 이런 감성도 귀농하고나 볼 수 있지 도시에서는 어림도 없던 일이다. 어느 호텔보다 더 전망 좋은 곳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도 복이다 싶다.

산골로 돌아와 차를 다시 다리 결에 두고 눈썰매로 환자를 오두막까지 수송했다. 주현이는 밀고, 초보농사꾼은 끌고...

언덕을 그리 오르자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환자는 뒤로 나자빠지기를 몇 번 하더니 아예 무릅 꿇고 엎드려 실려 온다.

그러나 그 애비가 또 누군가. 장난기가 발동한 것. 언덕에서 눈썰매의 줄을 놓으니 그 아래의 사고 현장으로 현장검증을 졸지에나 간 선우. 환자를 이래도 되는 거냐며 악을 쓰며 웃는
선우와 주현이...

그리 오두막에 도착해 생각해 보니 그만한 것이 보통 다행이 아니다.
그건 다른게 아니라 유난히 머리통이 큰(극비사항!) 선우가 무게 중심이 머리로 쏠렸더라면 머리를 심하게 다쳤을 텐데 그나마 몇 년 겨울백수 때마다 눈썰매를 탔다고 무게 중심을 잘 잡아 발만 다친 게 다행이라는 뜻이라니까 선우가 하는 말
"엄마, 그 말은 선우를 두 번 죽이는 말이예요..."
이리하여 선우의 눈썰매 2일 천하의 막이 내린 셈이다.


어느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부모는 자식으로 인해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심으로 인해 보리심을 내고, 보리심으로 인해 깨달음을 이룬다. 그러므로 자식이 없다면 그 어버이는 결코 성인(成人)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식을 애간장 태우는 귀찮은 존재로 여기지 말고 선지식이나 스승으로 고쳐 생각하라”는 교훈이다.

바람이 분다.
하얀 눈천지에 달이 비치고 살며시 바람까지 불어재낀다. 산골아이들이 눈먼 나를 길안내하는 존재임을 다시 한 번 느끼는 그런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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