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눈 속에서 숨죽이며 있다가, 제 몸을 짓누르는 눈이 녹음과 동시에 하나, 둘 삐죽이 머리털을 내미는 원추리.

햇살과 비를 먹고 하루하루 무성한 풀로 자라도 관심을 받지 못하다 어느 날 갑자기 뱀 대가리 쳐들듯 꼿꼿하게 제 목을 추켜세운다.

그것도 성에 안차는지, 하루아침에 등황색 꽃을 피우고는 목에 더 바짝 힘을 준다.
사람이나 꽃이나 목에 너무 힘이 들어가면 그 순간부터 볼 장 다 본 것이다.
꽃에서도 나를 들여다 볼 수 있으니 산골에서는 스승이 따로 없다.



산골에서 살다보니 가슴으로 신선한 공기가 들어가 그런지 초보농사꾼이 가끔 간 큰 짓을 한다.
예전에는 농기계 등이 필요하면 자신이 기계치라는 사실을 예의주시하고 행동했었다. 내게 몇 번이나 구입의사를 흘리고 결국 자신의 의견대로 되지 않으면 두고두고 진을 뺐다.
그런 경로로 산골로 굴러들어오게 된 농기계가 한둘인지. 트렉터가 그랬고, 관리기가 그랬고, 분무기...

   
그런데 이번에는 좀 쎈 거였다. 포크레인... 그 비싼 포크레인 운운을 하니 일을 어찌 수습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럴 때 내세우는 나의 전략 하나. 나 역시 세게, 아주 드세게 달려드는 거다.

그리 한 번은 불길을 꺾었는데 잊었나 싶으면 또 불을 지르고, 지르고 상습범이 되었다. 옛말에 방귀가 잦으면 똥 나온다고. 이번에는 어디서 보고 왔다느니, 가격이 얼마니, 구체적으로 늘어놓는다. “햐~ 쎈데???”

사실 산골에 포크레인이 필요한 것만큼은 사실이다. 시도 때도 없이 수해가 나고, 비포장길을 고수하는 바람에 수해는 맡아 놓고 나는 개울 옆 다리, 논, 밭이 떠내려 가고, 축대가 무너져 하우스를 덮칠 지경이고, 이곳저곳의 축대가 무너지고, 퇴비도 뒤집어야 하고...

그럴 때마다 포크레인을 부르다보니 만져보지도 못하고 손가락 사이로 모래 빠지듯 나간 돈만 해도 그 얼마인가. 다 알지만, 워낙 기계치니 중고를 산다 해도 고치느라 드는 돈에, 그 놈 고치러 다니느라 일 공치는 비용에다, 울화통 터지는 비용까지 계산하면 그게 그거다 싶어 뱃속 편하게 포크레인을 부르며 살자 했다.

그러나 아무리 어르고 꼬드겨도 끄떡없는 마누라 고집에 일단 한 숨 죽였다가 나훈아의 노래가사처럼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하며 포크레인을 못 잊어 하는 초보농사꾼.
그래도 “중고인생”이라는 본분은 잊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마누라 허락도 안받고(마누라가 시키는대로 사는 날이 박찬득이가 다 산 날이란다) 영주에서 오래된 놈으로 계약을 하고 온 초보농사꾼. 새 것의 가격이 4천7백만원 정도 하는 것을 2백십만원 주고 사왔으니 썩은 정도는 상상 속의 몫.

그리도 기다리던 포크레인이 오는 날. 그 비를 맞으며 포크레인을 퇴비더미 옆으로 갖다 놓고는 어깨가 한 치 올라간 초보농사꾼이 와서 보란다. “썩은 거 어디가남. 반대한 내가 뭐 신바람이 난다고 이 비 오는데 가보겠는가. 담에 보지.”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선우가 학교 갔다 오니 독수리가 병아리 움켜 채가듯 선우를 데리고 퇴비장으로 간다. 애비가 한 시범 보이자마자 호기심하면 둘째가라면 서운해 할 선우가 포크레인에 오른다.

이리 저리 몇 번 헛손질하더니 퇴비를 한 바가지 퍼서 옆으로 옮긴다. 초보농사꾼 그만하면 안심이라는 듯 내려왔는데도 포크레인 엔진소리는 여전히 둘둘거리더니만 퇴비더미를 거뜬히 옮겨 놓았다.

얘기가 여기까지면 귀농 5년차가 아니지.
다음 날,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초보농사꾼 결국 어린 딸까지 포크레인 실습에 가세시킨다. 학교에서 돌아온 주현이를 붙잡고, 어미새가 새끼에게 공중제비 시범이라도 보이려는 듯 한 기세로 퇴비장으로 향한다.

뭣도 모르면서 포크레인에 앉은 주현이는 잔뜩 굳었던 표정이 봄눈 녹듯 풀린다. 이번에 지 오빠가 옮겨 놓은 퇴비더미를 원위치 시키는 어린 딸을 대견하게 쳐다보는 초보농사꾼.
주현이만 두고 내려온 초보농사꾼이 “애들이 게임하는 세대라 그런지 나보다 훨씬 잘해”한다.

게임이라 봤자 1주일에 통 털어 2시간도 못하는 데 무슨?? 자기 감각이 딸린다는 소리는 죽어도 안한다.
비는 쏟아지는데 아이들만 두고 온 초보농사꾼은 걱정도 안한다.
우산 들고 올라가 보니 두 놈이 달랑 포크레인에 다 들어가 앉아 번갈아 가며 퇴비를 공기돌 놀리듯 하고 있다.

도시 같았으면 이 가방 저 가방 바꿔 들고 학원을 전전했을 시간에 산골아이들은 돈도 안들이고 스스로 잘도 배운다. 학원에서 배운 것보다 딱딱한 포크레인 의자에 앉아 배운 것이 훨씬 자신감이 생기고 그들만의 꿈의 알갱이가 더 영글었을 것이다.
곧이어 엔진소리가 꺼지고 오두막으로 온 아이들의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다. 그 어깨에 얹어진 힘은, 산골아이들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쓰일 기름이요, 지혜요. 용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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