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과 봄이 제 밥그릇 싸움을 하고 있다.
흰눈이 아직도 온 땅을 점령하고도 모자라 혹시 봄에게 자리를 빼앗길세라 땅을 다 얼려 놓았다.
그 와중에 그 틈을 뚫고 겁없이 올라오는 놈이 있다.
원추리싹.
어린 것이 그 눈 속에서 동상도 안걸리고 견딘 것이 여간 대견스러운 것이 아니다.
고슴도치처럼 삐죽이 머리를 내밀고는 점점 지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머리부터 디밀고 보기는 인간사와 별반 다름이 없지싶다.
산골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이 생강나무꽃이라면 원추리는 가장 먼저 세상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놈이다.
난 원추리싹처럼 정신을 곤질러 세우고 새 봄을 맞이하고 있는지....


   
선우가 중학교에 입학하는 날이다.
초보농사꾼은 대구 교육가는 날과 겹쳐 아이들과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꽃을 무엇으로 살까?

내가 좋아하는 후리지아로 하자.
그리하여 그의 첫 출발이 상큼하기를...

옷은 무엇으로 입을까?
빨간 체크 무늬 치마를 입어야지.

그리하여 그의 마음이 항상 밝고, 맑기를...
지애비가 차를 가져가야 하니 8시 버스를 타야 하고, 그러려면 최소한 7시에 국도변까지 걸어내려가야겠지.

이 눈길을 뚫고....

그러나 그런 행복한 상상도 잠시 뿐...
초보농사꾼의 말 한 마디에 머리를 쓸고 다니던 들뜬 생각들은 일순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이곳에는 부모없는 아이들이나, 부모와 떨어져 사는 아이들이 많고 , 그 애들은 버스타고 혼자들 갈텐데 같은 버스타면서 티내지 말고 그냥 집에 있으란다.
'그래두 그렇지...'

나 역시 이해는 하지만 한번도 상상하지 못한 돌발 사고였다.
서둘러 설득해 보려 했지만 자신의 생각이 옳은줄 알란다.
자기가 차를 두고 가서 우리 식구끼리 타고 가면 상관없단다.
하지만 같은 버스에 같이 그리 갈텐데 자식 가진 엄마라면 생각해 보란다.
다급해진 마음에 선우에게 물었다.네 생각은 어떠냐고...

"아빠 말씀도 옳아요."
엊저녁 갑자기 습격받은 가슴은 활화산이 된다.
내가 치맛바람끼가 있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귀농 전, 그러니까 선우가 어려서다.

내가 직장을 다닌 관계로 어린 선우와 제대로 시간을 같이 하지 못해 늘 안스러웠고 그 때문에 고민고민하다 결국 사표를 던졌다.
전공을 살리고 뭐고 아이들 정서를 생각하니 하루가 급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때의 그 안스러움은 가슴 한 켠에서 나를 자극하고 있다.

그런 선우가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입학을 하는데...
아무리 부부라지만 에미의 그 마음을 애비가 얼마나 헤아릴까.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단 둘이 있을 때 한 얘기였다면 묵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놈이 있는데서 가장이 한 얘기라 입을 씰룩거리다 눈을 허옇게 뜨고 돌아 눕는 것으로 후리지아꽃과 체크 치마는 물건너 갔다.

이른 아침, 초보농사꾼은 대구로 교육을 가고 ,선우도 체크 무늬 교복을 입는다.
그래도, 그래도 서운하여 입학기념 사진을 오두막에서 박았다.
"선우야! 엄마가 입학식을 지켜보든 안보든 언제나 밝고 맑기를 바란다. 엄마가 좋아하는 함석헌 할아버지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의 '그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장이 되길 빈다. 하지만 잘 들어두어라. 너 또한 그런 사람을 찾기 전에 네 스스로 '그 사람'이 되도록 노력한다면 엄만 더 없이 좋겠구나. "


--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선우가 산골을 나서고 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세계로 힘찬 걸음을 내딪고 있다.
아무쪼록 그의 걸음 걸음마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빌어보는 아침이다.

 

얼떨결에 오두막에 혼자 남은 시간이다.
머리로는 입장정리가 끝났는데 마음은 아직도 옹색해져 있다.
차를 마신다.

온갖 잡념들은 차 향에 녹초가 되고 마음도 조금씩 수습되어 간다.
차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찻잔 속에 교복을 입은 선우가 웃고 있다.
아이들에게 둘러 싸여 교가를 부르고 있다.

애들 말로 내 '커피잔'은 MP3면 MP3, 디카면 디카가 다 된다.
선우 얼굴로 서서히 내 환한 얼굴이 겹치길 기다리고 있는중이다.

산골 오두막에서 배동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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