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가뭄은 겨우내 눈 속에서 산 산골식구들에겐 오히려 반가운 일인지도 모른다.
산천이 뽀송뽀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사도 그렇듯이 다 좋을 수만은 없는가보다.
가뭄으로 개울이 말라붙어 그 옹아리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귀가 건조하다.
귀가 건조하면 이내 마음에도 버짐이 핀다.
눈보다 귀다 더 마음에 가까운가 보다.
그래서 마음이 건조하지 않도록 듣기를 두 배로 하라고 귀가 하나 더 있는 모양이다.

귀농하면서 아이들에게 약속한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그들이 원하는 개를 키우게 해준다는 것과 열심히 농사지어 일 년에 한번은 다른 나라는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여행하자는 것이었다.
전자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후자의 경우를 실천하려면 막말로 빡시게 일하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묻는다. 귀농할 때 가져온 돈이 넉넉하여 그러는게 아니냐고.
물론 대답은 NO다.
가져온 돈은 벌써 바닥을 친지 오래다.

그렇다면 농사지으면서 어떻게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지 궁금해 한다.
답은 단순하다.
사람마다 삶의 우선순위가 있다.
어떤 사람은 아파트 평수에, 어떤 이는 자동차에, 어떤 이는 과외비 등에 우선 순위를 두고 앞만 보고 달린다.

나도 귀농 전에는 머리에 흰띠까지 두르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래서 조용필의 노래 가사처럼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웠나 보다.
그러나 귀농은 40년 가가이 다져온 나의 가치관도 순식간에 뒤흔들어 놓을 정도의 위력이 있었다.

   
산골가족의 우선 순위는 '여행'이다.
그러다 보니 비가 새는 집에 살아도, 15평도 안되는 오두막이라 장농이 안들어가니 이불을 한 켠에 쌓아놓고 살아도 문제될 게 없다.
남이 보기에 어떨까하는 생각은 귀농 전에 다 한강에 띄워보내고 나섰다.
남이 내 인생 대신 엮어 주는 것도 아닌데 내 소중한 삶을 남의 거울에 비추며 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두 해 전 고추농사를 말아먹은 해를 제외하고는 어찌 어찌 약속을 지켰다.
올해는 주현이가 가고싶어 하던 호주를 다녀왔다.
내가 아이들과의 여행을 강조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개똥철학이 있다.
아이들에게 눈에 보이는 보석을 물려주면 털어먹기 십상이고, 자식을 게으르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머리와 가슴에 넣어주는 보석은 털어먹을 일도 , 그것을 믿고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다.
마음에 보석을 많이 간직한 사람일수록 살아가면서 사나운 파도를 무난히 헤쳐나갈 수 있고, 막다른 길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는 지혜가 있으며, 삭막한 세상을 윤기있고 영롱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어려서부터 아이들 가슴에 유산을 물려주고 있는 거다.
아인슈타인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의 길뿐이다. 한 가지는 어떤 일도 기적이 아닌듯이 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모든 일이 기적인듯이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모든 일이 기적인듯이 살기위해서는 삶의 잣대가 어디에 꽂혀 있느냐가 중요하다.
삭막한 돌무데기 위에 꽂혀 있는지, 생명이 숨쉬는 대지 위에 꽂혀 있는지...
여행은 숨쉬는 대지와 같은 것이다.
어머니 품 속같은 대지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고 , 꿈을 퍼올릴 수 있으며, 지혜를 키울 수가 있기때문이다.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계절이다.
이제 열심히 흙에 엎드려 땀흘리고 정성을 쏟을 일만 남았다. 그것을 추수하면 주어진대로 깨알만한 보석을 아이들 가슴에 남겨주기 위해 우린 다시 뜰 준비를 할 것이다.

불영계곡은 초록잔치로 요란맞다.
초록이 얼마나 화려하고 눈부신지 아는가.
그것은 불영계곡만이 연출할 수 있다고 우기고 싶다.
그러나 내 사는 곳은 불영계곡처럼 풍광이 빼어나서라기보다 사람과 어우러짐이 부드러워 아름다운 산중이다.

산골 오두막에서 배동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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