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펑펑 온다.
저 혼자 오게 두면 좋으련만 바람은 썩은 고기를 본 하이에나처럼 어디서 타났는지 단박에 참견을 한다.
눈을 이 골짜기로 몰고 다니고 저 골짜기로 몰고 다닌다.
눈이 줏대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보는 이의 편견일 뿐.
둘은 서로 좋아 산골을 휘젓고 다니며 그들 방식대로 망년회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들의 휘날림에도 리듬이 있다.
그러나 이젠 눈은 눈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제 몸놀림을 했으면 좋겠다.
나도 한해 동안 나의 몸놀림과 입놀림을 되돌아봐야 하는 것처럼...


한 해의 끝이다.
입에 모터를 단 것처럼 따다거리던 입도 잠시 닫게 되는 그런 시기다.
마음도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하고 뭔가 하던 일을 잊은듯 멍한 그런 시기다.
일명 '세모 증후군'이 아닐런지...

다른 증후군은 몰라도 '세모 증후군'은 많이 앓을수록 좋은 것같다.
왜냐하면 고무탄내 나도록 내달려오다가도 이 때만 되면 완전 자동으로 페달을 놓고 뒤를 돌아다 보게 되니 말이다.
지나온 발자욱마다 무늬와 색깔이 다양하다.
어떤 것은 핑크빛이고 어떤 것은 검으티티해서 어둡고 말이다.

삶이 다 그렇듯이 어둡고 힘든 터널을 지나면 기쁘고 행복한 일도 있고 그렇게 한숨 돌릴라치면 다시 살마있는 자의 값을 치러야 하고 말이다.

지나온 발자국의 무늬와 색깔의 판독을 잘 해야 새해의 땟깔이 고울 거라는 생각이다.
그 판독능력은 무엇이 결정할까.

   
우선 자신을 낮추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끔껏은 하얀 교복의 풀먹인 칼라처럼 고개 빳빳이 들고 다녔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에게 풀이 죽어야 한다.
풀이 죽어 흐들흐들해야 속뜰을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내 자신이 한 해를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 살벌하게 진단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지금껏은 단순하게 살려고 노력했어도 이 때만큼은 해골복잡할수록 좋다.

내가 나를 못믿는다.
나를 합리화하고, 나를 포장하고, 과대평가하는 정도는 일도 아니었으니 나를 낮추어야만 눈을 뜨고도 못보는 오류를 피할 수 있다.

한 해의 벼랑 끝에 서봐야만 내가 나를 가장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지 않나싶다.

불가에서는 10세 전후에 입산한 스님을 '올깨끼'라고 부른단다.
그 이후에 입산한 스님을 '늦깨끼'라고 부르고...

'늦깨끼'는 늦게 들어 왔으니 어서 공부하라는 의미이고, '절밥 도둑놈 올깨끼'는 절밥만 오래 먹고 공부하지 않아 아직 중생에 머물러 있으니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의미라고 지허 스님은 설명하셨다.

새해가 되면 귀농 8년차가 된다.
그 정도면 '올깨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산중 밥만 오래 먹었지 아직도 도시물이 덜 빠진채로 잡사에 시달리고, 욕심만 그득해서 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하는 세모이다.

나무는 봄과 초여름에 많이 자라지만 늦여름에는 조금밖에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은 반대로 나 잘났다고 사느라 전반부에 자라지 않다가 세모에 많이 숙성되는 것같다.
이 때 얼마나 자신을 담금질하느냐에 따라 나이값도 결판나고 말이다.

이제 지나간 짐은 정리정돈을 잘 한 후 제자리에 수납함으로써 새 날을 맞을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거저 얻는 새해가 아님을 스스로에게 일깨우고 또 일깨워 '순간'에 사는 새해이길 희망한다.

지금껏은 쌍심지 켜고 앞만 보고 내달렸다면 이 세모에는 두 눈이 없는듯 내리감고 지나온 뒷그림자를 분석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작업에도 법칙이 있어야 한다.

이 날 이때까지는 내 허물은 덕지덕지 덮고 살았다면, 이 때만큼은 나목처럼 홀랑 벗고 서있어야 한다.
내 안의 아픔이 따르겠지만 허물이 적나라하게 나부끼도록 냉정해져야 한다.
이제껏은 자신에게 관대했어도 지금만큼은 눈 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자신에게 쌀쌀맞게 굴어야 한다.

그런 작업이 끝나면 나를 다독이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병주고 약준다고 해도 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몸조리하듯 영혼을 조리해야 하는 시간이다.

나만이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튼튼한 영혼으로 무장되어 새해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보던 달도 자신의 뒷그림자를 분석하느라 그렇게 날카로웠나 보다.
지금은 그도 '영혼조리’ 기간인지 제법 얼굴이 통통해져 있다.
'세모 증후군'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산골아낙을 위로차 찾아온 것같다.

달빛이 훤한 마당에 섰다.
바람도 숨을 죽이고 오두막 옆으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도 옹알이 소리를 그친 것으로 보아 그들도 새해맞이를 위해 목상중인가 보다.

지금 산중은 모두가 ‘새해맞이 묵상수행중’이다.

산골 오두막에서 배동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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