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침 잠을 깨워주던 새들이 기특하기만 했다.
창호문 가까이에다 대고 모닝콜을 해주니 하루가 도시에서보다 부드럽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여간 고마운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요즘 또 하나 터득한 것은 그런 새들이 부쩍 늘어났다는 거다.
아침에나 인식했던 새들을 밭에서 일할 때도 그들과 늘 함께 있다는 것을 무딘 내가 인식할 정도니 그 수가 어떤지는 감잡을 수 있을 것이다.
증가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텐데...
첫째, 산골엔 농약을 치지 않으니 귀농 7년차 동안 하나, 둘 새들이 모여 들었을 확률이다.
둘째, 귀농해서도 사는데 바빠 새가 짖는지, 울어 재끼는지 인식 조차 못하다가 이제 숨을 돌릴만 하니 인식할 확률 하나다.

인면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운다는데 그거야 내 귀로 못들어 봤으니 알바 아니고 어떤 이유든 지금 고추밭에서 김매고 있는 내 주위를 돌며 아는체하는 그들의 소리가 제일 아름답다.


오늘은 만사 재껴 놓고 인제로 가야 한다.
초보농사꾼이 귀농 전 현대 본사 교육과에 몸담았던 멤버들이 그대로 지금껏 모임을 갖고 있다.
하나, 둘 현대를 떠나는 사람이 생겼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모임이 이어지고 있으니 특이할만한 모임이지 싶다.

인제에 도착해 그 시절, 그 사람들이 모여 술잔이 돌아가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아내들은 그들대로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테니스 엘보'라는 병명으로 팔에 붕대를 칭칭감고 참석한 초보농사꾼도 팔의 통증을 '반가운 인연'과의 만남으로 승화시키려는듯 했다.

그렇게 일박을 하고 산골로 출발했는데 강가에서 번지점프를 하는 이들이 보였다.
그러니 딸 주현이가 누군가.
호기심 박씨 2세가 아닌가.
바로 뛰어내린다네...

위험한 동작을 하는 놀이라 사실 안전시설면에 내심 의문이 갔던 것이 사실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63M라는데...
그러다 보니 무섭지 않느냐, 중간에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어쩐다로 잔뜩 겁을 주어 포기시키려 했는데 허사였다.
단숨에 뛰어 내릴 수 있단다.

'아니, 중1짜리가 이렇게 스트레스가 쌓였나?'싶을 정도로...

이쯤되면 박씨들의 호기심을 누를 수는 없다.
4만원을 지불하고 애비와 기념 사진까지 박는 주현이.

같이 사진을 박아주는 초보농사꾼 표정이 딸보다 더 굳어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꼭대기에서 심호흡을 하고 서 있는 박주현 선수

언젠가는 그도 부모에게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와 홀로 바람맞는 벌판에 저리 서야 하리...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데 벌써 이 놈은 뛰어 내려 공중에 몽당연필만하게 거꾸로 매달려 있다.

거꾸로 보는 세상이 어떠 했을까.
한 경험 하고 온 아이가 다음에 오빠랑 와서 또 뛰어 내리고 싶단다.
선우는 공부하는데 리듬깨진다고 자진 불참했다.

주현이가 안전장비를 착용하러 갔을 때, 막 뛰어 뛰어 내렸다 올라온 젊은이는 어떻더냐고 걱정스러워 묻는 내게 다시 탈 생각이 없다하드만...

저 놈의 박씨 호기심 피는 못속인다.
본인은 아무렇지 않아 하지만 혼자서 긴장하고 무서워 떨었던 난 머리가 아파왔다.
안전 장비를 풀고 온 주현이 눈이 다시 한번 번득거린다.


번지점프 시설 옆에 공처럼 생긴 기구를 본 것이다.
그것은 슬링샷이라고 하는 것으로 번지점프의 변형된 형대란다.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펴고 내려오는 기분이 드는 체험이라는 담당자의 설명에 주현이가 또 침을 흘린다.
호기심의 원조이자 주동자인 초보농사꾼도 놀라는 눈치다.
그러나 타는 곳으로 걸어가는 두 박씨.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슬링샷은 2인 1조란다.
초보농사꾼이 뒷걸음질 치며 어제 마신 술때문에 그러니 나더러 같이 타란다.

난 호기심과가 아닌 배씨이고, 고소공포증에, 어지럼증 그리고 간이 콩알인데 무슨 수로 그걸 타겠는가.

울며 겨자먹기로 초보농사꾼 기구에 앉았다.
공이 튀기도 전에 바짝 쫄은 초보농사꾼과는 달리 여유만만한 산골소녀.

그렇게 사정없이 그 높은 하늘로 공은 쏘아지고 그 공이 허공에서 회전할 때마다 악악 소리가 땅으로 내리 꽂혔다.
그 목소리의 진원지는 초보농사꾼.
주현이는 짹 소리도 없다.

귀농 전, 늘 바쁜 아빠를 이웃집 아저씨 대하듯 하던 주현이는 산골로 와서 아빠와 친구가 되었다.
그 이상 복이 있을까.
주현이는 이것만은 괜히 탔다고 들입다 후회할줄 알았다.
초보농사꾼의 비명소리가 하늘을 찌르기에...

그러나 대답은 먼젓 번과 똑같다.
다음에 오빠랑 와서 또 탄다고...

이야기가 여기까지면 오죽이나 좋을까마는 여기까지는 서론이다.
5만원을 다시 지불하고 째진 기분으로 돌아오는 길.

한참을 내달리는데 차의 시동이 꺼지더니 탄내가 나고 동시상영으로 차 앞부분에서 연기가 치솟는 것이었다.
서서히 차선을 바꾸어 갓길에 차를 세웠다.
연기는 더 기승을 부리고 냄새는 더 찐하게 코를 자극했다.

안그래도 긴 주행을 하고 나면 앞부분에서 물끓는 소리가 심했다.
그때 고쳤어야 했는데 고속도로에서 이리 위험한 지경에 처한 것이다.
자주 가는 차센타 사장과 통화를 하고 나서 한참 열을 식힌 다음 차 안에 있는 생수를 죄다 부었는데도 물이 부족하단다.
생수통을 들고 물을 찾아 산기슭으로 들어가는 초보농사꾼을 말렸다.

내가 차에 대해 뭣도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냄새나 연기, 그리고 열로 보아 심각한 상황이니 그냥 렉카차를 부르자고 했다.
그러나 내 말을 들었는지 안들은 척 하는 건지 담배를 피워 물더니 쭈그리고 앉는다.
한참을 서성이는 초보농사꾼.

그때 생각했다.
'아니, 복잡하게 생각할 게 뭐있담. 그냥 렉카차 불러 가면 될 일을... 엣다,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집부리는 초보농사꾼이 이해되지 않아 난 갓길에 주현이와 앉아 책을 보았다.
한참만에 물을 길어온 초보농사꾼.

구두는 진흙 구덩이에 빠져 엉망이고 바지는 흙물이 튀고 젖어 너덜거렸다.
'뭐하러 저러나. 그냥 차를 부르자니까...'
길어온 물을 붓고 열을 식힌 후 시동을 걸어 보았지만 역시 걸리지 않자 렉카차를 부른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결국 렉카차에 우뚝 올라타고 울진으로 향했다.
렉카차에 이렇게 올라타보긴 첨이다.
주현이가 한 마디 거든다.

"엄마, 오늘 너무 많은 경험을 하는 것같아. 번지점프, 슬링샷, 렉카차까지..."

"......................."

한참을 그리 달렸다.
렉카차 기사 옆 자리에 타고 가는 초보농사꾼의 뒷모습이 보였다.
왠지 그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장'이라는 완장 탄 자만이 짊어지는 무게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상황에 직면했지만 주현이와 난 제3자적 자세였겠지.
어떤 상황에서도 식구를 안심시키고,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마음은 남달랐겠지...
내와 주현이만 타고 가다가 이리 되었다면 내가 갓길에서 책을 보았을까...

왜 그이인들 대뜸 렉카차를 부를줄 몰랐겠는가.
렉카차 비용이 문제가 아니라 책임진 자로서 할 수 있는 행동을 다 하고자 했을 것이다.

'가장'이라는 완장을 찬 사람들의 가슴에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책임감, 고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들은 부적처럼 그 부담감을 품고 사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에게 그들의 고독을 담배씨 만큼이라도 헤아려 준다면 그들은 날개를 단듯 날아오르지 않을까.

가족 구성원이 '가장'의 마음을 알아줘도 그만 안알아줘도 그만이겠지만 전자와 같다면 그 가정엔 어떤 어려운 파도도 잘 타넘을 수 있는 특별한 무기를 가진 셈이다.
그러나 요즘 세태는 어떤가.
죽으라 가족들을 위해 전투를 치른 사람에게 그동안의 공적을 치하해 주지는 못할 망정 머리에 서리가 내리면 가족 구성원 중 제일 훌쭈그리한 존재로 평가절하하는 세상이니 참 씁쓸하다.

왜 난 내중 가만 있다가 렉카차에 대뜸 올라타고서야 이 사실을 깨달았을까.
처음 갓길에서 책을 펼 때의 심정은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느냐, 부정적으로 생각하느냐의 차이가 아닐까'하는 되먹지 않은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게 아닌 것을...

나도 맞벌이를 해봐서 안다.
대부분의 경우 "당신만 벌어? 나도 벌어"라고 침튀기며 말하는 맞벌이 부부의 싸움 대화가 심심찮다고 한다.
그러나 같이 벌고 안벌고의 문제가 아니다.
같이 벌어 가정에 공평하게 봉사를 해도 마음적으로나마 책임감을 느끼고 사는 쪽은 '가장'이라는 말이다.

다른 얘기가 아니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남자라는 이유로 '가장'이라는 완장을 자연스레 부여받고 죽을 때까지 어깨에 또 하나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가족 구성원들이 따뜻한 눈길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렉카차 위에서 해보았다는 말이다.

차 고치는 비용으로 1백30만원주었다.
그러나 그 댓가로 귀한 사실을 깨달았으니 아깝지 않다.
초보농사꾼이 밭에서 돌아오기 전에 그가 좋아하는 매운 고추, 곰취, 마늘을 씻어 놓고 삼겹살을 구워야겠다.

산골 오두막에서 배동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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