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비 오는 날의 연속이라 그런지 노을이 갑자기 그립다.
짱짱했던 해가 막 좌판을 걷을 무렵이면 먼 산 아래 노을이 붉은 속살을 펼쳐 보이곤 했었던 가을날들.

그 붉은 속살 아래 서면 내 얼굴도, 오두막도, 노란꽃도 모두가 덩달아 붉게 전염된다.

뚜렷한 형체는 어디로 가고 노을의 관리하에 들면 모든 것이 부드러워지고 몽롱해진다.

노을의 구성 성분에 환각제가 들어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아래서는 용서못할 사람도, 미움도 모두가 삭아 없어지고, 그저 '홀로 가는 삶'이라는 인식이 눈에 더 찐하게 들어오니 말이다.

모질고, 각박하고, 메마르고, 험한 세상에 '그렇게 살지 말라'는 신의 문자 메시지를 전하러 온 '자연천사'같다.
그런 노을이 왜 이 장마철에 그리운걸까?


요즘 서점가에서는 92세 타샤 할머니의 책이 화제가 되고 있다.
버몬트 숲 속에서 30만평의 정원을 가꾸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그는 미국에서 사랑받는 동화작가이면서 화가이기도 하다.
어려서는 그의 집에 마크 트웨인, 소로우, 아인슈타인, 에머슨 등 유명인들이 출입하는 명문가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1740년대 농가를 그대로 재현한 집에서 꽃과 나무를 가꾸고 손으로 천을 짜서 옷을 만들고, 염소젖으로 요구르트를 만들며 동화같은 삶을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계절 내내 발목까지 덮는 그 긴 원피스를 입고 그 넓은 정원을 가꾸고 먹거리를 심고 거둔다.
'이 지구상에 널린 게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없겠어?'라고 넘기면 넘길 수 있는 정도지만 왠지 그렇지가 않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자신에게 묻게 된다.
'넌 그 나이가 된다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겠니??"하고 말이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것만 빼면 타샤의 모습 어디에도 92세라는 딱지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 삶의 방식, 생활모습은 하루 아침의 다짐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방식을 좌지우지하는 가치관이 오래 전에 정립되어야 하고 그 가치관의 테두리 안에서 습관화되고 의식화된 언행 오랫 동안 쌓여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부모세대는 예전에는 글로 썼지만 '난 아무렇지 않아' 세대다.
당신 목에 거미줄이 쳐졌어도 자식에게는 볼따구니가 미어터지도록 지름진 것 넘겨주려 했고, 당신은 일자 무식이라도 자식 머리에 먹물 넣어주려고 기를 썼던 세대다.

그렇게 키운 자식이 서운하" 하면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가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하며 발등을 찍는 세대이기도 하다.

그때의 시대적 여건이 그런 세대를 만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세대가 무조건 안고 가야 한다.
그것만이 그분들에 대한 작은 보답이기때문이다.

그런 세대에게 교육을 받은 지금의 우리 '어중띤 세대'

내 자식에게 헌신은 하지만 내 삶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끼어들기 시작한 세대다.

그러니 '어중띤 세대'의 자식들이 커서 서운하게 했다고 해서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하고 말해봤댔자 씨도 안먹힐 세대다.
우리 '어중띤 세대'는 자식에게 최선을 다하면서 내 노후도 혼자 스스로 잘 챙겨야 한다.

유대인들은 자식에게 그런다질 않는가.
"내가 너희에게 최선을 다했듯이 너도 네 자식들에게 최선을 다하라. 그것이 내게 하는 것이다"라고...

그러려면 우리 '어중띤 세대'부터는 늙어서도 '혼자서 잘 놀아야 한다'
자식에게 부담주지 않고 하루하루 의미있고 재미난 삶을 살아야 하는 세대란 말이다.

문제는 그런 인식은 어찌어찌 하고 있는데 보고 배울 데가 없는 세대라는 사실이다.
우리 윗 세대들에게 그런 지혜와 삶의 방식을 컨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우리 부모세대는 내가 너희에게 희생한만큼 '너희와 함께'라는 분위기가 안개깔리듯 영혼의 내면에 깔려 있는 세대라고 볼 수 있기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세대부터는 그것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

'혼자서도 잘 놀아야 한다'는 것은 혼자 잘 놀 수 있는 놀이, 즉 소일거리가 있어야 된다는 의미도 물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이 될 수 있어야 하고 거기서 재미와 꿈도 함께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92세의 타샤 할머니처럼 되려면 하루 아침에 마음 한번 다부지게 먹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법정 스님의 글이 생각난다. 

깨어 있는 영혼에는 세월이 스며들지 못한다.
세월이 비켜간다.
깨어있는 영혼은
순간순간 살아있기때문이다."

자식들에게 적성과 소질을 찾아 개발해 주려고만 눈에 쌍심지를 켤 것이 아니라 나의 소질과 적성을 개발하여 그것을 죽을 때까지 삶이 기름지게 하는데 써먹어야 한다.

이것은 핵가족화를 더욱 부추기려는 얘기가 아니다.
자식 따로, 에미, 애비 따로 잘 놀자는 의미가 아니다.
대가족 제도로 복귀할수록 이런 시대적 숙제에 응답해야 한다.

대가족 제도하에서 자식 눈만 쳐다 보는 삶과, 내 삶을 스스로 잘 가꾸면서 자식과 어우러지는 삶과 어느 쪽이 가정평화에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측면에서도 우리 '어중띤 세대'가 잘 준비하고 처신해야 할 일이라고 이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TV에서 여자들이 고급 미장원이나 마사지실에서 피부가 탱글탱글하도록 별의 별 것을 얼굴에 바르고, 피부에 주입하는데 열을 올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 사람들이 나이들어서의 영혼이 탱글탱글하도록 하기 위해 그만큼의 노력을 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나 또한 말은 이렇게 하지만 지금 남의 얘기할 처지가 아니다.
타샤 할머니처럼 그런 아름답고 가치있는 삶을 이마에 주름이 자글자글하도록 살기 위해서는 내 적성과 잠재력에 지금 물을 주고 있는지 남의 말 할 처지가 아닌 것같다.

산골 오두막에서 배동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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