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도서관에 갔다가 '능소화'라는 소설책을 하나 발견했다.

습관적으로 첫 표지를 넘기자 '원이 엄마의 편지'라는 제목의 속지가 나왔다.

그 안을 보니 400년 전에 남편의 무덤에 넣은 아내의 편지가 소개되어 있고, 1998년도, 무덤 속 편지에 대한 신문기사 내용이 연이어 소개되어 있었다.

그 당시 KBS '역사 스페셜'에서도 이 내용을 다루어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었다고 한다.

내 기억에도 그때의 사연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뉴스를 본 것인지, '역사 스페셜'을 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마나 그때 기억의 파편이 예리했으면 지금껏 남아 있을까.

이 소설은 픽션이 아니고 논픽션이다. 즉 실화를 바탕으로 한 글이다.

이 책을 쓴 조두진 교수는 그 당시 그 무덤 속 편지의 판독작업을 맡았다고 한다.

이 책 처음부터 끝까지 무덤에서 발견된 400년 전 편지글과 그 이후에 발견된 원이엄마의 일기를 재구성한 것이니 그것은 한 조선시대 여인의 애절한 사랑과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그대로 표현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98년 안동시 정상동 산기슭에서 택지개발을 위한 공사를 하던중 무덤이 발견되었다.

무덤에서는 400여년 전 조선시대에 죽은 사람의 미라와 가족들이 써넣은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놀라운 것은 무덤에서 함께 발견된 다른 사람의 편지는 모두 심하게 상했지만 죽은 이의 아내가 쓴 편지는 거의 원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무덤은 조선 명종 때, 안동 세도 가문에서 태어난 이응태의 것으로, 그 안에서 발견된 그의 아내의 편지는 400여년 된 편지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31살에 요절한 남편에 대한 애절한 사랑과 사랑하는 이를 잃고 자식과 살아갈 막막하고 기막힌 심정이 그래도 종이에 녹아 들어서일까?

내가 봐도 원본 사진속 편지 글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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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아버지에게 --병술년(1586년)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당신은 언제나 저에게 둘이 머리가 희어질 때까지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저와 어린 아이는 이제 누구 말을 듣고, 누구를 의지하며 살라고 먼저 가십니까?

당신, 저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오셨나요? 저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저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당신은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잊으셨나요? 그런 일을 잊지 않으셨다면 어찌 저를 버리고 그렇게 가시는가요?

당신을 잃어버리고 아무리 해도 저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빨리 당신 곁으로 가고 싶습니다. 어서 저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는 잊을 수가 없어요. 이 서러운 마음을 어찌할까요? 이제 제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까요. 어린 자식을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아갈 날을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합니다.

 

이내 편지보시고 제 꿈에 와서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어째서 그토록 서둘러 가셨는지요? 어디로 가고 계시는지요? 언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는지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어떤 운명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우리 함께 죽어 몸이 썩더라도 우리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저는 그 말씀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써서 넣어드립니다.

당신, 제 꿈에 오셔서 우리 약속을 잊지 않았다고 말씀해주세요. 어디에 계신지,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지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당신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이 있다고 하셨지요?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을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시라는 것인지요? 아무리 한들 제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를 자세히 보시고 제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씀해주세요. 저는 꿈에서는 당신을 볼수있다고 믿습니다. 아무도 몰래 오셔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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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편지는 끝을 맺고 있었다.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편지는 한 장의 종이에 빼곡히 세로줄로 써내려간 편지로, 공간이 모자라자 종이를 돌려서 위의 빈 공간에 틈도 없이 채워져 있었다.

얼마나 남편에게 할 말이 많았으면 그리 하였을까.

이 애절한 편지글이 발견되고 나서 한참 후에 조 두진 교수는 일본의 간사이 외국어 대학교 기타노 노부시 교수에게 이응태 부인 여늬의 일기글을 입수하게 된다.

이 글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더욱 가슴 뭉클함을 전해주고 있다.

이 일기 글이 하도 애절하여 그 중 몇 편을 골라 옮김으로써 함께 울림을 나누고자 한다.

날짜도 없는 일기는 다음과 같다.

 

<세상은 제자리로>

곡하던 대소가의 어른들과 아이들은 제 집으로 떠났습니다.

방석은 제자리에 있고, 병풍은 벌써 걷었습니다.

막종이는 손에 침을 뱉어가며 장작을 패고, 늙은 박서방은 너른 마당에 종일 게으른 비질을 합니다.

박서방의 힘에 겨운 신음소리가 방안까지 들려 안쓰러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원이는 동네 아이들과 몰려다니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립니다.

시아버님은 끼니를 거르지 않았습니다.

아주버님은 예의 호탕한 웃음을 짓고, 턱수염을 절도 있게 쓰다듬습니다.

이번에 임해 군수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울지 않고 ,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모두 제자리를 찾아, 가고 왔습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사위는 고요했습니다.

너무 고요해서 제가 꿈속에서 운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당신이 떠난 줄 알지만 저는 자주 놀랍니다.

낮은 발소리에도 놀라고 낙엽 뒹구는 소리에도 놀랍니다.

나뭇잎이 공연히 떨어지고 발소리가 저 혼자 날 리 있겠습니까.

저는 잎 지는 소리에 당신이 왔음을 압니다.

초겨울 빈 가지에 걸린 달빛이 홀로 외롭습니다.

 

<배 내리던 밤>

(중략)

저는 당신이 떠나지 않았음을 압니다.

죽음이 사람을 갈라놓을 수 없음도 압니다.

차가운 냉기 속에서도 당신의 체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당신의 미소를 볼 수 있습니다.

소쩍새마저 잠든 밤에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자시를 지날 무렵부터 비가 내렸습니다.

마당에 엎드린 졸던 개가 몸을 부르르 떨며 대청 아래로 기어듭니다.

비는 소리도 없었지만 저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겉흙에 입힌 떼는 해가 바뀌어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찬바람을 피하시는지요.

소리내지 않고 일어나 안채로 연결된 중문의 고리를 비껴내고 방문 걸쇠를 풀어둡니다.

대청마루 삐걱대는 소리가 고요한 밤에 천둥처럼 크게 들립니다.

행여 누가 깨지는 않았을까요. 공연히 어른들께 걱정을 끼칠까 두렵습니다.

젖은 시간은 참 더디게 갑니다.

꽃향기 가득하고 나비가 날던 시절, 시간은 얼마나 우리를 재촉했는지요.

부산을 떨던 세월은 언제 그랬냐는 듯 뒷짐 지고 느릿느릿 걷습니다.

그렇게 더디 걷는 세월을 앞지를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아무리 걸음을 빨리해도 느릿느릿 걷는 세월의 뒷모습만 보입니다.

어서 가자고 재촉해도 심술궂은 세월은 얄미운 뒤통수만 흔들어댑니다.

사람은 떠난 후에야 비로소 그리워지는 법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함께 있어도 그리워했는데 당신이 가시고 없으니 그리움이야 오죽하겠습니다.

강물은 굽이굽이 만나고 헤어지기를 거듭하지만 끝내 다시 만나는 법이라고 하셨지요.

걸음을 재촉한 강물도, 더디 흐른 강물도 바다에서 만나기는 매한가지라고 당신은 힘겨운 목소리로 말씀하셨지요.

저는 당신이 힘겹게 이어가신 말씀을 잊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서둘러 떠나셨고, 저는 남았지만 우리는 바다에서 만날 것입니다.

 

<벌 나비가 찾지 않는 꽃>

꽃들은 피고 지기를 거부하지만 벌과 나비가 찾지 않습니다.

빗물 머금은 나무는 여름 햇볕을 받아 무성하지만 새들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습니다.

승회, 당신은 얼굴도 보지 못한 아이입니다.

아장아장 걷던 승회가 뜀박질을 시작했고, 제 형과 더불어소리 내어 웃지만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비 온 지 오래지만 젖은 기왓장은 좀처럼 마를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풍문도 많았습니다.

서방을 잡아먹은 년이라는 소문이 담을 넘어 안채까지 기웃거렸습니다.

어찌나 흉측한지 처음엔 깜짝 놀랐습니다.

시커먼 얼굴에 손질하지 않은 수염이 덥수룩한 소문은 누런 이를 드려내고 키들러겼습니다.

저는 갑자기 늙어버렸습니다.

아직 머리에 눈이 내릴 나이는 아닙니다.

가을바람이 불던 날 검은머리에 흰눈이 내렸습니다.

시아버님이 안채 건넌방 뒤에 별채를 새로 지었습니다.

하회당입니다.

굳이 제 생각을 물어 지으신 이름입니다.

강물처럼 돌아 흘러 만난다는 말입니다.

(중략)

별채에 앉으면 더 이상 소문이 들리지 않습니다.

소문은 더 이상 담을 넘어 기웃거리지 못합니다.

제 울음소리도 더 이상 담을 넘지 않습니다.

아무도 제 울음소리를 들을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 앉으면 가까운 곳이나 먼 곳에서 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제 울음소리를 잊었지만 저는 울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과 겨울이 오고 갔습니다.

풍문과 소문은 연기처럼 사라졌지만 저는 별채에 앉아 울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집 뒤란 너머 대숲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연못에서는 빗살 같은 물결이 일어났다가 사그라집니다.

왔다가 떠날 바람이 다시 찾아왔는가 봅니다.

 

<친정으로 돌아와서>

홍구의 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거기서 죽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른들과 친지들이 결정하신 일입니다.

시아버님은 살아 계실 때 제 얼굴을 마주하시는 것을 무척 힘들어 하셨습니다.

시아버님은 단 한번도 당신의 마음 속 고통을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그 깊은 뜻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중략)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일가친척들이 결정하신 일입니다.

어찌할 도리 없는 일입니다.

당신과 함께 천렵하던 반변천은 여전히 소리 내며 흐르지만 냇가를 메우던 웃음소리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미름(쌀창고)는 비어 있고, 뜰에는 잡초가 무성합니다.

당신이 호랑이를 잡으려고 만드신 벼락틀은 비 맞고 바람 들어 버섯이 자랍니다.

호랑이를 잡아야할 벼락틀이 버섯에 허물어집니다.

당신이 먼저 떠나시고 그 해 가을 친정 아버지가 떠나셨습니다.

친정아버지는 고운 사위 잃은 아픔을 견디지 못하셨습니다.

더 이상 손들은 찾아오지 않고 문지방엔 먼지가 보얗게 앉습니다.

사계절 제철 따라 꽃이 피던 담벼락엔 칡넝쿨이 기어오릅니다.

이 모두가 당신이 계시지 않기 때문임을 저는 압니다.

함께 먼 길을 온 아이들은 '여기가 외갓집'이라며 겅중겅중 뛰어 다녔습니다.

아이들은 마당 흙을 파며 놀다가 함께 온 막종이를 따라 안동으로 돌아갔습니다.

낮잠이 든 승회를 막종이가 등에 업고 떠났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쌔근쌔근 잠자던 우리 승회, 깨고 나서 엄마가 없으면 울텐데요.

엄마가 보고 싶다고 얼마나 울어 ?힐까요.

한번 울면 쉬이 그치는 아이가 아닙니다.

막종이는 승회의 서러운 울음을 어떻게 달랠까요.

고샅을 나서던 원이는 자꾸 뒤를 돌아보며

"엄마는 왜 같이 가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곧 따라가마"라고 말하고 초당으로 들어와 소리 죽여 울었습니다.

방문 열고 들어온 친정 어머니가 제 어깨를 붙잡고 오래오래 우셧습니다.

박복한 저는 기어이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막종이 등에 업혀 잠자던 승회의 작고 측은한 어깨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아이가 다녀갔습니다>

몸뚱이는 이전의 몸뚱이가 아닙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면 끙 소리가 제 먼저 알고 입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행여 친정 엄너리가 들으실까 두려워 아랫배에 잔뜩 힘을 주고 입단속을 해야 합니다.

안동에서 원이가 다녀갔습니다.

키가 훌쩍 커버린 원이에게서는 언뜻언뜻 청년 티가 납니다.

키가 큰 원이의 걸음걸이가 당신의 걸음걸이와 무척 닮았습니다.

땅거리막 내릴 무렵 저 혼자 마당을 거니는 원이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세월은 강철을 녹이고도남을 힘이 있다고 했던가요.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저는 자주 확인합니다.

원이를 따라온 막종이는

"승회 도련님도 서방님을 쏙 빼닮았습니다"하고 묻지도 않은 말을 합니다.

당신을 어디에 계시는지요?

가끔 안동집에 들러 아이들 얼굴이라도 보시는지요?

아이들 꿈에라도 자주 오셔서 이야기를 나누시는지요?

제 꿈에 오시듯 아이들 꿈에도 오셔서 당신과 제 이야기를 들려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슬픔을>

(중략)

가위에 눌려 소리치고 몸부림쳤습니다.

잠에서 깨고 싶어 몸부림치고 고함을 쳤지만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저는 깨지 못했습니다.

놀란 어머니가 달려와 제 몸을 흔들어 깨우고 나서야 겨우 눈을 떴습니다.

식은땀에 요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잠들지 못하고 아침을 맞았습니다.

그날 아직 해가 중천에 뜨지도 않았을 때 안동 시댁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원이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며칠 전부터 앓아 누웠답니다.

건강한 아이라 툭툭 털고 일어날 줄 알았는데 어젯밤 갑자기 떠났다고 합니다.

앓던 원이는 떠나기 전날 어미인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혼절한 아이가 어머니, 어머니 하고 몇 번이나 저를 불렀다고 합니다.

나는 어째서 내 아이의 애달픈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까요.

원망스럽고 또 원망스럽습니다.

나는 귀머거리처럼 사느라 내 아들의 울음 섞인 마지막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중략)

당신 잃고 원이 잃고 제가 어찌 하루라도 더 살 수 있겠는지요.

세상이 온통 허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댑니다.

이 슬픔을 저는 어찌 해야 할까요.

 

<능소화를 심으며>

(중략)

바람이 불어 봄꽃이 피고 진 다음, 다른 꽃들이 더 이상 피지 않을 때 능소화는 붉고 큰 꽃망울을 터뜨려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큰 나무와작은 나무, 산짐승과들짐승이 당신 눈을 가리더라도 금방 눈에 띌 큰 꽃을 피울 것입니다.

꽃 귀한 여름날 그 크고 붉은 꽃을 보시거든 저인 줄 알고 달려와 주세요.

저는 붉고 큰 꽃이 되어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중략)

곡기를 끊었습니다.

사흘 동안은 물을 마셨지만 이제 물마저 끊었습니다.

이렇게 곡기와 물기를 끊어 저는 당신과 아이가 있는 곁으로 갈 작정입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눈앞이 흐릿했습니다.

이제 저는 낯익지만 모진 세상과 작별하고 정다운 사람들 곁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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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많은 여늬라는 여인의 일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일기의 내용을 이렇게 길게 나열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31살의 남편을 잃고 힘들게 살아가는 여인의 앞에 여러 가지 힘든 파도가 더 덤으로 덮친다.

그 고통 중에는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이 많았다.

우선 네 사람들의 입방아가 여인을 두 번 죽인다.

'서방 잡아먹은 년'이라는 소문이 끊이질 않아 여인을 숨쉴 기력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런 며느리를 사랑해서인지, 밖에서의 나쁜 소문이 가문에 흠을 낼까 두려워서인지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위해 별채를 지어준다.

별채에서는 밖에서의 어떤 소리도, 안에서의 여인의 통곡소리도 담을 타고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는다.

남의 슬픈 일에 동냥은 못할 망정 쪽박을 깨는 것이 우리네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곳에서의 생활.

그러던 어느 날, 시어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 어른들과 친지들이 여인을 친정으로 내친다.

어린 원이와 뱃속에서 아버지와 이별하느라 아버지 얼굴도 못본 둘째 아들 승회와 생이별을 하게 된다.

어린 자식과 함께 살아도 견디기 힘들 세월을 그 핏줄을 남겨두고 친정으로 가는 여늬.

그렇게 여인은 친정에서의 찢어지는 아픔을 홀로 견디며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아들 원이 마저 세상을 뜨고 난 후 이제 스스로 생을 포기하려고 곡기를 끊는다.

이 사연을 접하고 난 오랫 동안 마당을 서성였다.

부부,,,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 중에 부부로 만났다는 것.

참으로 소중하고 귀한 인연이거늘...

그러나 살면서 늘 귀한 인연으로 알고 사는지...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다.

목숨을 끊어가면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사랑하며 애닳아 하는지....자신에게 묻는다.

결혼할 때의 그 절절하고 평생 갈 것 같은 그 사랑이 지금 어떤 색을 띠고 있는지....자신에게 묻는다.

400년 전의 조선시대 여인이 이 찬란한 현대를 살아가는 여인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고도 모자라 깊은 묵상에 들게 한다.

내가 힘들고, 눈 앞의 파도가 두려울 때, 읽고 또 읽으며 나를 담금질하려고 긴 일기글을 적어두었다.

초보농사꾼에게 아내인 나는 초심과 같은 사랑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지 가슴의 오래된 방에 대고 물어본다.

마당을 한참이나 서성였는데도 딱히 자신 있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여인의 설움을 알기라도 하듯이 올해는 하얀 초롱꽃이 먼저 피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의 대답도 그렇게 하얗게 질려 고개를 숙이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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