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들이 여름이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풀과의 전쟁이라는 말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풀과의 전쟁은 이미 끝났고 지금은 패자부활전 아니면 부상병 치료를 할 때이다.

주로 패자는 농부이고 부상병 또한 농부이다.

당연하다.

자연을 이겨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자연은 배려하는 마음도 깊어 그 부상병을 위해 파란 하늘을 선물로 준다.

파리디 파란,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그 하늘 아래서는 패자도 승자도 없다.

그렇게 어우러져 가는 것이 농촌의 맑은 모습이다.

 

어느 책에서 보니 장미가 야생의 찔레꽃으로부터 개량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말 그대로 개량했다지만 장미 어디에서도 찔레꽃의 청순함, 순진함, 다소곳함, 순박함, 기다림과 같은 분위기는 눈씻고 봐도 없다.

내가 보는 장미는 요즘 애들 말로 원판이 형편없는 관계로 견적이 많이 나와 돈을 많이 들여 성형한 꽃같다.

장미에게 미안하지만...

찔레꽃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고 화려하고, 현란하고 그렇다.

얼마나 개량의 개량을 거듭했으면 원 종자와 거리가 먼 꽃이 되었는지...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세상이 보기 좋은 떡에만 관심을 들입다 쏟는다고 해도 너무 성형을 많이 한 사람을 보면 눈조차 마주치기가 겁난다.

그런 사람에게서 사람냄새를 맡을 수는 없다.

왠지 실리콘 냄새(실리콘에도 냄새가 있는지 몰라도...), 조화처럼 플라스틱 냄새가 날 것만 같아 마주 앉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에 장막 하나를 치게 된다.

좀더 있으면 마음이 거북해져 정신을 집중시킬 수가 없다.

성형했다고 옛날 사람들 표현대로 까졌다라는 동일한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는 것을 나도 안다.

내가 이곳에 와서 알게 된 얼굴 중에 늘 보고싶은 얼굴이 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높지 않은 코, 쌍꺼풀 없는 눈... 전형적인 동양 얼굴 그 자체로 얼굴만 보면 그저 평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여자에게선 만날수록 끌리는 그 무엇이 있다.

"남편 직장따라 왔는데 이제는 울진사람 다 되었어요"하며 웃는 눈이 깊고 서정적이다.

여자가 여자에게 끌린다는 것은 요즘 애들이 동방신기, SG워너비, 소녀시대에게 환장하는 것 이상이다.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뻐드렁 이, 움푹 패인 보조개... 게다가 그의 입에서는 남을 험담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을 정도로 그는 맑은 소리를 흘리는 여자였다.

그런 요소들이 그를 보고싶어 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면 원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산골에서 코스모스만 봐도, 풍경의 청아한 소리만 들어도 그를 만나 차 한 잔 같이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그런 사람이다.

산골에는 워낙 농사 일이 많다보니 읍에 볼 일이 있어 나가면 급한 일만 보고 돌아오기 바쁘다.

그런 중에도 잠시 불러내어 차 한 잔 앞에 놓고 가을을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이 이는 여자다.

난 그런 여자가 좋다.

한 눈에 혹하는 여자보다 같이 앉아 있을수록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여자가 좋다.

세상은 정신없이 돌아간다.

여유라고는 눈씻고 봐도 없다.

오래 뜸들일 시간이 없고, 죽치고 앉아 향기를 맡을 시간 따위는 두 말하면 잔소리다.

단박에 보고, 느끼고 판단해 치워야 한다.

그러다 보니 단박에 '보기 좋은 떡'을 원하는 오류를 범한다.

뜸을 들이며 사람의 향기를 맡을 수가 없다.

사람은 사람의 향기를 맡아야 내 안에서도 사람 냄새를 조금이나마 만들어 낼 수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쓴 '향수'라는 책에 나오는 주인공 향수제조사 그르누이라면 사람냄새쯤은 식은 죽 먹기로 만들어 내겠지만 불행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것이 맞아 떨어져야 사람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 복합적인 것 안에 인위적인 것은 들어가지 않는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난 장미보다 찔레꽃을 자빠지도록 좋아한다.

귀농 초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으면서 가시까지 많다고 입을 씰룩이며 낫으로 잘라 버렸던 찔레꽃을 지금은 사랑하게 되었다.

이제 얼마 후면 빠알간 열매를 매달고 내 눈에서 알짱거릴 것이다.

그 찔레꽃 열매를 보게 되면 한 해 동안 난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향기로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고, 어떤 향기로 사람 진절머리나게 했는지 자신에게 거듭거듭 냉정한 잣대를 들이댈 것이다.

가을이 이래저래 무섭다.

지금 이 순간 비는 하염없이 쏟아져 풍경소리를 누르고 있다.

풍경 또한 찍소리도 못하고 입 꾹 다물고 있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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