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군 죽변면 봉평리는 옛날 신라 왕이 교(敎)를 내린 마을이다.

봉평리는 군내의 많은 마을 중에서 왕과 관련된 사실이 입증된 유일한 마을로 「울진군지」나 「울진군 지명 유래집」에는 봉평리의 유래를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봉평(鳳坪)마을은 1590년경 봉성(鳳城)에서 살던 영양인(英陽人) 김계근(金啓瑾)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동해 연변(沿邊) 건좌(乾坐)의 숲 사이에 있는 작은 못(池)가 바위 밑에 가면 좋은 징조(徵兆)가 나타나리라 하였다. 그 후 꿈에 나타난 곳을 찾아가 보니 바위 밑에서 찬란한 빛의 봉황(鳳凰)새가 물을 먹고 산으로 날아갔다. 이로 인하여 이 산을 봉황산(鳳凰山, 富興峯)이라 하고 이 못을 봉지(鳳池)라 하였다. 또한 봉황새가 있던 들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샛들(鳳坪)이라 하고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봉평마을개척자 김계근의 후손이 세운 봉황지 유허비(봉평리 소재)

그 후 1714년(숙종 10년)에 담양인(潭陽人) 전백현(田伯賢)이 입주하면서 봉평을 초평(草坪)이라고도 하였는데 일설은 1901년에 울진현령 김좌봉(金佐鳳)이 봉평의 봉(鳳)자가 자기의 이름자와 같다 하여 봉(鳳)자를 초(草)자로 바꾸게 한 것이라고도 하였다.

또 ‘지명유래총람‘에도 연도가 조금 다를 뿐 위의 내용과 비슷하게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위의 기록들은 조선시대 이후에 생긴 유래이고 그 보다 훨씬 오래전인 524년에 신라 23대왕인 법흥왕이 봉평마을에 교(敎)를 내린 것이다. 이 사실은 소문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국보 제242호인 「울진봉평신라비」가 입증하고 있다.

울진봉평신라비에는 왕이 교를 내린 사실 외에도 당시 울진 지역의 지명이 「거벌모라 (居伐牟羅)」였다는 것과 울진 지역의 중심지가 ‘봉평리’로 추정토록 암시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신라왕은 언제, 무슨 교(敎)를 내렸을까?

「신라 제 23대왕인 법흥왕은 신료 13명과 함께 AD 524년 봉평마을의 소요 사건에 대하여 충분한 논의 끝에 교를 내렸다. 당시 이곳은 신라의 땅으로 신라왕의 통치를 받아 왔으나 어느 날 이곳 주민들이 신라조정에 항거하여 성(城)을 에워싸고 불을 지르는 등 큰 민란이 일어났다. 소요사태가 얼마나 큰지 이곳에 있는 병력으로는 진압이 안 되어 신라왕은 경주에서부터 많은 군대를 보내 소요사태를 진압하고 마을의 책임자들을 문책하였다. 교(敎 )라는 것은 문책하는 내용에 대해 하교한 말이다. 그리고 다시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비석를 세워 오금을 박았는데 이것이 ‘봉평신라비’이다.

봉황이 날아간 봉지(鳳池)에 세운 봉황정

이 비석은 1988년 1월 객토를 하던중에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이 비석의 탄생으로 AD 520년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였다는 것과 신라6부촌이 존재하였다는 삼국사기의 내용이 입증되었다. 또한 신라 왕권의 한계와 직제, 관등명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또한 고대 비석중 이 비석에서 최초로 “비(碑)”라는 글자가 표기되었음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마을의 속명들을 살펴보면 나름대로 역사와 관련있는 의미들이 조금은 담겨있다.

마을 중앙을 흐르는 ‘항골(項谷)’을 중심으로 북쪽은 양지마, 남쪽은 ‘음지마‘라 부른다, 양지마의 아래쪽을 '샛들’이라 하는데 이는 “봉황새가 날아간 들” 이란 뜻으로 봉황이 있었다는 연못이(鳳池) 있다. 그리고 작은 마을과 함께 꽤나 넓은 평지 농토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부근 전체를 ’벌마‘또는 ’버릿마‘ 라하는데 이는 봉평 신라비에 나오는 ’거벌모라‘의 ’벌‘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양지마을 위쪽에는 호랑이 꼬리를 닮았다하여 ‘호미골 (虎尾谷)’이 있고 마을 북쪽 야산 언덕은 ‘거금실(巨金)‘이라 했는데 지금은 비행장으로 변하였다. 옛 지명대로 거대한 철제 시설물이 들어선 셈이다.

‘음지마’ 쪽은 바닷가와 연접되어있는데 이 마을에서 예전에 장경호와 같은 많은 고대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어 고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음지마 뒷산 넘어 계곡을 ‘압지(鴨池)’라 하는데 지금은 ‘봉평신라비 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음지마의 위쪽에 ‘동치(東治)’ 계곡이 있는데 얼마 전만하여도 예비군 본부가 있었다.

그리고 음지마의 맨 위쪽 계곡은 조선 연산군때 영해 박씨가 개척한 마을이라하여 ‘박실’, 또는 ‘박곡’이라 부른다. 시대의 발전에 의해 옛 모습들이 계속 사라지고 있지만 그 뿌리는 잊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2011.6 참고자료제보 임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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