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남면 금매2리 목련봉(木蓮峰) 아래 병풍처럼 둘러쳐진 석벽 밑에는 몽천(蒙泉)이라는 신비한 샘이 있어 사시사철 차고 맑은 물을 뿜어낸다.

몽천에 기대어 화강암으로 쌓은 기단위에 자그마한 비각이 삼조어비각(三朝御批閣)이다. 비각의 화려하고 산뜻한 단청이 몽천의 잔잔한 연못에 비쳐 마치 동양화 한 폭을 보는 듯하다 .

삼조어비각은 조선시대에 세 임금의 답신을 모셨다는 의미인데 삼조(三朝)라 함은 효종과 숙종, 그리고 정조임금을 말한다.

 

효종임금은 삼남지방에 8년 동안이나 기상이변으로 재해를 입자 병신년(1656)에 민간 선비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글을 올릴 것을 하교하였다.

이에 이 지역의 선비인 윤우암(尹憂庵) 선생은 당시 정치의 폐단에 대해서 구체적이고도 애절한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

만언소(萬言疏)로 일컫는 이 상소문은 효종임금을 감동시켜 임금은 조선조 최고의 글이라 칭찬하고 상소 내용대로 바로잡겠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두 번째 비답은 우암선생의 장남인 삼족당이 '국가편선(國家便宣)' 十七조를 들어 상소한 내용에 대하여 숙종대왕이 답신을 보낸 것이다.

세 번째 비답은 우암선생의 증손인 황림(篁林)이 철학서를 지었는데 강원감사를 통하여 이 책을 구하여 읽으신 정조대왕이 감동하여 편지를 보낸 것이다.

우암(憂庵) 선생의 휘(諱)는 시형(時衡)이고 字는 평중(平仲)이다. 그는 선조 32년(1602)에 출생하여 현종4년(1663)에 하세하시니 향년 62세였다.

매화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하던 윤우암 선생은 효종임금이 민간선비들에게 조언을 구하자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  

만언소(萬言疏)로 일컫는 이 상소문의 요지를 간추려 보면, 중앙정치는 물론 지방의 정치와 행정, 풍속에 이르기까지 현실적인 폐해를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 지적하였고 대안으로 4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임금이 학문을 연마하여 덕을 쌓아야하고(修君德). 둘째 실력 있고 충성심 있는 인재를 가려 등용해야하고(擇人才). 셋째 민심을 얻어야하고(得民心). 넷째 백성들로 하여금 미풍양속을 계승하고 부정부패를 없애야 한다는 요지였다.

즉『요순(堯舜)시대가 태평성대를 이룬 것은 임금이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상통하달이 되었기 때문이며, 제왕이 학문을 열심히 연마하여야 심성이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관리를 등용함에 있어 능력이 출중한 인재를 뽑아야 함에도 권문세가의 자제들을 뽑으니 어진이가 뽑히지 않는다. 또한 과거시험에 부정이 없도록 해야 하며, 세금이 날이 갈수록 많아져서 백성들의 살림이 곤궁해지는 원인이 되고 있다. 공물의 종류가 많아 관속들이 세금을 빙자하여 지나치게 착취함으로서 민심이 날로 악화되고 있다. 역(驛)에서 기르는 말(馬) 사육과 관련하여 많은 부조리와 억울함으로 패가(敗家)되는 사례가 많으며 노비들의 지나친 공역으로 인해 민란이 일어날 지경에 이르렀다.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어른 공경하는 효심이 사라지고 사치와 음란한 행위만 숭상하며 의불의(義不義)를 추구해야할 젊은이들이 이불리(利不利)를 따지는 악습이 늘어나고 있다.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셔서 백성에게 충성심과 검소함을 심어주고 소망을 갖도록 해 주소서하는 내용이다.』

이에 효종임금은 아래와 같은 답신을 보냈다.

"윤시형의 상소문을 살펴보니 그 내용이 잘 갖추어져 있다. 초야에 묻힌 한 선비로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남보다 배로 큰데 이는 오직 충성심에서 비롯되고 있음이라, 기쁘기 한량없다. 두 번 세 번 읽어도 차마 놓지를 못하겠다. 내 어찌 그대의 말을 명심하지 않겠는가? 정치의 잘못은 내 마땅히 바로잡을 것이다.”

효종임금은 답신과 아울러 상소문을 출판하여 전국 8도의 수령 방백들이 모두 읽도록 저보(邸報)에 실었다.

(참고문헌 : 울진군지, 울진의얼, 향토사연구(1988)/울진향토사연구회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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