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피리계곡
울진에는 젖줄로 불리우는 왕피천(王避川)이 있고 서면에는 왕피리(王避里)라는 마을이 있다.

이렇듯 '왕피'라는 지명이 쓰이는데 그 근원은 무엇일까? 흔히 구전되는 얘기로는 옛날 왕이 피신해 왔다는 데서 그 유래를 찾는다. 그렇다면 정말 왕이 이곳으로 피신해 왔을까? 또 그 왕은 누구일까?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구전 설화가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역사적으로 고증할만한 자료는 별로 없다. 그러나 어떤 왕이었던 간에 왕이 피신해 온 것은 맞는 말인 것 같다.

'왕피'라는 명칭에 대하여 고려 공민왕이 피신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삼척 실직군왕이었던 '안일왕'이 피신해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고려 공민왕이 울진에 왔다는 기록은 어느 문헌에서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삼척 실직국의 '안일왕'일 것이라는 내용은 비록 지방 역사지이지만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조선 중종때 완간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울진현조에는 '재현(在縣) 서41리(西41里)에 안일왕산이 있고 이 산은 울진의 진산(鎭山)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고적편에는 '안일왕산성이 있고 그 규모는 석축주칠백오십삼척(石築周七百五十三尺)인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모두 '왕'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으로 산 이름도 '안일왕'이란 이름으로 지어졌고 산성의 명칭도 '안일왕산성'이라 지어져 있다. '안일왕 산성'의 축성 기원에 대해『울진군지』에는 '실직왕(悉直王)이 도적의 난을 피해 현의 서쪽인 소광리 세덕산 위에 석성을 축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가 '파사이사금'(102년) 때 동해안을 계속 침략하여 우중국과 실직국이 신라에 복속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안일왕은 성을 쌓고 끝까지 항거하다 죽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왕피리'라는 지명에 대해서도『구 울진군지』에는 '옛날 삼척의 실직국(悉直國)이 울진의 파조국(波朝國)과 병합해서 한 부족 국을 이루고 있을 때 강릉, 예(穢)국의 침공을 받아 안일왕이 피신하였다는 설과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피신한 곳이라고 하여 왕피동이 한다'고 적고 있다.

'왕피리' 부근의 많은 자연부락 명칭도 왕과 호위군사들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왕의 호위군사가 주둔하였다는데서 유래된 병위(兵衛), 장군터, 홍이동(洪伊洞), 더빙이(전곡리) ▷임금이 앉아 조회를 한곳이라 하여 임광터(林光基) ▷안일왕의 옥좌가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된 옥생이(玉山) ▷예국왕이 실직국왕의 추격을 당해 패주하다가 갈증이 나서 물을 먹다가 투구를 걸어둔 채 달아나니 그 나무가 박달나무였다는 데서 유래된 박달골 ▷군수물자 창고가 있었다는데서 유래 된 거리고(巨里庫) ▷왕이 내를 건널 때 몹시 차다하여 붙여진 한천, 한내(寒川) ▷왕이 피난시 수행한 신하와 군졸들이 기갈이 심해 주민들에게 음식을 청해 먹고 감사의 표식으로 지어주었다는 '포전' 등 오늘날까지도 많은 지명들이 전해져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지명들과 문헌들, 그리고 구전되는 설화들을 종합해 볼 때 울진으로 피신해 왔다는 왕은 실직국의 '안일왕'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하겠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 울진 구군지. 대동지지. 울진군 지명유래집. 고대사회의 울진. 삼척시지. 삼척문화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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