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나는 나의 입이 노래하면 나의 귀가 들을 뿐이구나”라고 니체가 탄식했다지.

절절하고 애절한 고독의 극치구나 생각했었다.

그러나 자연에 기대어 아니 얹혀서 살다보니 그 보다 더 절절한 것은 노래도 가슴으로, 후렴도 손가락의 끄덕임과 함께 가슴 안에서 불러재끼면 인디언들이 가슴 속 가슴이라고 하는 영혼이 들을 뿐인 고독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

일부러 입을 닫는 것이 아니고 닫힘 속 활짝 열림의 의미와 그 맛을 알게 된 것이다.

고독의 시간은 가져도 그만 안가져도 그만인 선택사항이 아니라 인간이 더 인간적이고 나이값을 하기 위해서 고독은 필수사항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현대가 요구하는 인간상은 어디 하나 빈틈, 물샐틈 없는 야무진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고독 어쩌구 저쩌구 하면 저 인간 지금 트라우마 상태가 아닌가 하고 닦아 세우려 하겠지만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봐도 어디 하나 빈틈 없어 보이는 사람이야말로 그의 정신세계는 멍투성이일 것이다.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여유있게 고독 속에 발을 담그는 시간을 갖는 것이 오히려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읍에서 아는 분들과 오랫만에 중요한 모임이 있는 날이라 외출했었는데 초보농사꾼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집에 독일 손님들이 왔으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받고 보니 마음이 쓰였다.

무엇으로 손님대접을 하고 있을까.

독일 손님들에게 저녁이라도 내려면 서둘러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초보농사꾼이 야콘즙 작업을 끝내고 늘 하던대로 마을 입구에 있는 유이장님댁 가게(일명 방앗간)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단다.

그 어둔 밤, 국도가에서 왠 낯선 사람이 자전거를 고치기에 무슨 일이냐고 ane는데 보니 외국사람이더란다.

자전거 여행중인 독일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단다.

그럼 이 추운 날씨에 잘 곳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조금 더 가다가 한적한 곳에서 그냥 잘거라고 하더란다.

날이 이렇게 추운데 험한 고개를 세 개나 넘어야 하고, 그러려면 어둡고 힘도 들지만 이 추운 날 길에서 자면 큰일 나니까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던 것.

독일 청년은 또 한 명의 일행이 조금 쳐져서 오고 있다고 하더란다.

둘이건 셋이건 밖에서 자는 건 춥고 길도 험하니 일행을 기다렸다가 우리집으로 가자고 했단다.

단, 돈 걱정은 전혀 하지 말라고 미리 밝혔단다.

그래서 지금 독일 청년 둘을 데리고 집으로 와서 과일과 와인을 내놓았다는 전화내용이었다.

난 놀라지 않았다.

남편다운 행동이고, 이 험한 불영계곡을 자전거로 여행을 하다 어두워졌으니 하룻밤 따뜻한 곳에서 재워 씻겨 보내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마음이기도 했다.

국도가를 배낭 둘러매고 자전거를 타는 외국인을 보면 데려다 씻겨 따뜻한 밥 먹여보내면 좋겠다 그렇게 둘이서 이야기하곤 했었다.

마음은 실천하는 것까지가 완성이라는 것을 저도 초보농사꾼에게 배웠다.

모임을 서둘러 끝내고 파리바게뜨에 들려 그들이 좋아할만한 빵을 사고, 마트에서 반찬꺼리를 사서 집으로 내달렸다.

집에 도착해보니 셋이서 와인을 마시며 지도를 펴놓고 온몸(?)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독일 청년들은 나를 보자 남편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었다며 반갑게 맞는다.

그들의 눈빛이 어찌나 맑고 순수하던지...

손을 내미는데 두 청춘 모두 못씻은 흔적이 손등에 역력했다.

그것이 그렇게 파릇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길에서 삶을 배우고 고독과 외로움을 배우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표정이 순수하고 진지하고, 천진난만했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서로 손을 잡고 인사를 하다보니 두 사람 모두 양말 밖으로 나온 발가락이 먼저 아는체를 했다.

오랜만에 신선한 인사를 한 것같아 기분이 좋았다.

1년 동안 돈을 벌어서 나섰다는 젊은이들 중 한 명은 스물네 살 Fritz라고 했고, 다른 한 명은 스물일곱 살, Andreas라고 했다.

4,600km를 페달을 밟으며 여러 나라를 여행했고, 집 떠나온지 120일이 되었단다.

유럽, 중국, 한국을 거쳐 다음 주에는 동해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로 간다고 했다.

언제 독일로 돌아갈 거냐는 물음에 씩 웃으며 자기들도 모른다는 말을 했단다.

초보농사꾼은 서울에 있는 아들과 독일 청춘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서울의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바뀌어주었는데 청춘들끼리라 그런지 한참을 진지하게 통화하더란다.

서둘러 빵과 우유 등을 내놓았고, 치즈와 와인을 함께 나누었다.

오늘 우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둘이서 초코파이로 저녁을 때우려고 했다며 꺼내놓는다.

한국에서는 어디서 잤느냐고 물으니 그냥 길가에서 텐트도 없이 얇은 침낭에서 잠을 잤다고 했다.

물론 고생하면서 길에서 스승을 만나고 교훈과 지혜를 얻기 위해 나섰겠지만 이 험준한 불영계곡 중간에서 만난 아들같은 청춘들이라서 그들의 표정, 행동, 웃음 등이 오래전부터 봐왔던 것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던 중 한 젊은이가 배낭을 한참 뒤지더니 가족사진을 꺼내어 가족을 소개한다.

집 떠나온 사람은 그런가보다.

울타리로부터 다 훌훌 털고 나서도 오직 하나 가족의 끈을 그렇게 이어서 부적처럼 달고 다닌다는 것..

자전거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스티로폼을 네모나게 잘라서 몇개를 실은 것으로 보아 그것이 방이고 요인가 보다.

그 옆으로는 침낭이 매달려 있고, 물통, 옷가지 등이 소박하게 매달려 있다.

나도 스무 살 청춘인 아들과 고등학생 딸이 있기에 자식처럼 생각되었다.

아마 초보농사꾼도 그런 마음에서 우리집으로 가자고 했을 것이다.

그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헤르타 뮐러의 대표작 <숨그네>의 한 풍경이 생각났다.

소련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열일곱 살 독일 소년이 고된 일을 끝내고 난방용 무연탄을 판매하기 위해 러시아인 마을로 방문판매를 나섰다.

그 여인은 자기에게도 시베리아 수용소에 있는 또래의 아들이 있다며 굶주림에 지친 방문자에게 뜨거운 감자수프를 대접하고 장미꽃 문양이 수놓아진 귀한 손수건을 선물로 건넨다.

그 러시아 여인은 아들처럼 그를 맞았고, 아들처럼 그에게 귀한 손수건을 선물로 주었다.

그 대목을 읽으며 자식을 키우는 사람은 멀리 있는 자식을 생각하며 이웃을 대하는 것같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독일에서 온 두 청년을 대하며 러시아 여인의 마음을 떠올렸다.

그렇게 긴 이야기를 나누고 별채에서 하룻밤 따수운 잠자리를 준비해주었다.

샤워실을 알려주고 보일러에 불을 올리는 방법 등을 알려준 다음 아침은 8시 반에 모여 먹기로 약속을 하고 초보농사꾼과 내려왔다.

다음 날 아침에 만나서 식사를 했다.

식탁에서 먹지 않고 밥상을 차려서 먹었는데 우리처럼 바닥에 앉는 것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몇 해 전에 프랑스 신부님 두 분이 산골에서 주무셨었는데 그 분들은 처음으로 방바닥에 앉는다며 좌불안석이셨었다.

그런데 두 젊은이는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 앉아보았다며 책상 다리가 익숙했다.

여행이란 모든 상황에 적응하도록 만들어 주는 묘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포크를 주지 않고 숟가락, 젓가락을 주었는데 젓가락질을 하도 잘하기에 물었더니 중국에서는 스틸이라서 무지 어려웠는데 이건 나무 젓가락이라서 너무 편하고 좋단다.

아침 식사를 한 후 야콘즙을 주었더니 맛있다며 야콘가공실을 가보고 싶단다.

아침식사를 다 하고 나서 가공실로 안내했다.

하나하나 둘러보는 모습이 진지했다.

야콘즙을 줄테니 갈증날 때 시원하게 마시라고 했더니 극구 사양한다.

다른 것은 다 짐이 될 것같아서 사과와 귤을 싸주었다.

가다가 힘들고 갈증이 나면 먹으라고...

하룻밤의 인연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해주고 또 다시 길을 나서는 독일 청춘들..

몇 번이고 악수를 청한다.

그리고 이제는 헤어질 시간..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 하며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앞으로 자전거를 내몰면서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산골 부부를 바라본다.

어느 곳에서 살든 한 때의 인연을 기억하며 입가에 미소를 오랫동안 붙이길...

지금 그들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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