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예부터 경치 좋은 곳마다 정자를 지어 선비들이 학문을 논하며 풍류를 즐겼다. 울진에도 관동팔경으로 유명한 망양정, 월송정이 있지만 그 외에도 많은 정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 울진 읍내리 월변동 송림 속에 '취운루'가 있었다.

취운루(翠雲樓)라는 뜻을 직역하면 "솔 그늘 아래 누워 구름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물총새 지저귐을 듣는다"이다. 참으로 멋진 이름이다.

취운루는 "송림이 워낙 우거져 누각에 올라도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우거진 노송숲 속에 있었는데 오랜 풍우로 훼멸된 것으로 보이며 노송숲도 조금씩 벌목되다가 결국 1959년 '사라호 태풍' 이후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었다.

월변동 벼락바위 앞 하천

16세기에 쓰여진「신증동국여지승람」에 "취운루는 고을 남쪽 8리에 있다"라는 내용과 함께 고려말 문신 '안축'의 기문을 소개하였다. 

'안축'의 기문에 "내가 황경(皇慶)임자년 봄에 한필 말에 몸을 의지하여 선사군(울진의 옛 명칭)에 놀았다. 고을 남쪽 흰모래 평평한 뚝에 어린 소나무 수천그루가 있는데 다북 다북 사랑스럽다. 내가 함께 노는 읍사람을 돌아보며 하는 말이 "저 소나무들이 자라기를 기다려서 정자를 여기에 지으면 그 운치가 한송(寒松), 월송(越松)의 두 정자에 서로 갑을(甲乙)이 될것이다" 하였다. 그 후 읍사람이 나를 찾아오는 이가 있으면 나는 반드시 그 소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를 물었다. 태정(泰定) 병인년간에 존무사 박공이 선사군에 새 누대를 짓는데 풍치가 아주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그 장소를 물으니 곧 옛날 내가 절경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이다. 항상 이 누대에 오르고 싶었는데 지금 다행히도 이 지역에 나와 진무하게 되어 다시 이 누대에 오르니 그 맑고 그윽한 경치야 말로 이것이 진세염렬(塵世炎熱) 간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일이었다.(중략) 아 ~다락에 올라서 그 맑고 그윽한 운치를 얻게 되면 들판을 달리던 곤한 짐승이 밀림 골짜기에 들어간 것 같고 공중에 나르는 지친 새가 무성한 숲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지극히 낙이 있으니 이것이 아마도 이 다락을 지은 뜻일 것이다. 

또한 '안축' 선생은 「근제집(謹齊集)」에 아래와 같은 취운루 시를 남겼다. 

城南新構一層樓
성남쪽에 새로이 한 층의 누정세우고
裁種成陰地轉幽
심고 길러 그늘지니 땅이 그윽해 졌네
午日 燒空紅不漏
한낮에 타는 듯한 더위 새지도 않고
夏陰籠檻翠如流
여름 그늘 난간을 둘러 푸름이 흐르네
故人遠在誰同賞
친구는 멀리 있으니 누가 함께 즐기리
馹騎催行爲少留
말타고 길 재촉하다 잠시 머물렀네
舊眼稚松今己壯
예전보다 작은 솔 지금은 웅장하네
登臨感念昔年遊
오르며 다가가니 옛날 놀던 생각나네 

구 「울진군지」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군의 남교(南郊) 즉(卽) 월변동에 위치하였던바. 중고(中古) 송정(松汀)으로 송림(松木)이 울울창창하였으나 해방후 점차로 벌목되어 현재는 정자도 송목도 없는 주택지이다. 

최완수의「충의열전(1998)」에 보면 울진의 취운루 창건내용이 나오는데 "박팽년(사육신)이 관동존무사로 왔을 때 삼일포 사선정(四仙亭)과 경포대의 경호정(鏡湖亭), 그리고 울진의 취운정(翠雲亭)을 짓고 이익재와 안근재로 하여금 창건기를 지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렇게 보면 취운루는 본래 고려말에 세워졌다가 조선 전기에 또 한번 개축된 정자임을 알 수 있다.

최소한 두 번 이상 지어진 셈이다. 또한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필자의 짐작으로는 현재 월변동 벼락바위 맞은편 하천 쯤으로 비정된다.

그 좋던 경치를 지금은 감상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

(참고문헌: 신증동국 여지승람, 구 울진군지. 근제집. 충의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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