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부터 지금까지 산골가족의 정서를 담당했던 꽃들이 스러지고 찬란했던 그들의 터전은 쑥대밭이 되었다.

이제부터 나의 정서는 누가 벌충해주나 고민할 필요없다.

그동안 자연 옆구리에 살면서 가슴에 비축해 두었던 꽃들의 모습과 그들이 전하는 말을 하나하나 꺼내보며 겨울을 나면 된다.

자연에서 얻은 정서는 유효기간이 무한대라 한겨울 나의 정서에는 아무 걱정이 없다.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이처럼 자연에서 받은 기운은 헛되이 소비되지 않고 오래 남아 잡사에 시달릴 때 되새김질이 가능하다.

그런 기운으로 난 겨울을 날 것이다.

그러는 동안 겨울나무가 내 삶의 스승이 될 것이다.

겨울나무를 보며 내 안의 고요함을 잘 보고, 잘 건사할 생각이다.

내 안이 고요해야만 밖에 고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으니 눈보라치고, 눈속에 고립되어서도 난 여름의 그것처럼, 계곡의 물살처럼

생동감있게, 거침없이 겨울을 날 것이다.

 

오늘은 주일이라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점심을 먹으러 칼국수집으로 가면서 초보농사꾼이 김승하님(달길님)께 전화를 한다.

아마도 점심을 함께 먹은 다음, 산골로 같이 가서 전기를 봐달라고 미리 부탁을 해둔 모양이다.

칼국수집에서 달길님을 만나 함께 점심을 먹은 후 두 차가 산골로 향했다.

오늘은 초보농사꾼이 달길님께 SOS를 친 것.

야콘즙을 가공하는 가공실에 새로운 기계가 들어와 설치를 했는데 아마도 전기공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사용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전기선 공사를 좀 해달라고 한 것이다.

나야 자세히는 모르지만 하여간 초보농사꾼이 전기 때문에 달길님의 기술을 기부받는 날이다.

달길님네도 지금 공사가 진행중인데 다 손을 놓고 산골의 SOS에 그답 달려나왔을 것이다.

여기서 밝혀둘 것은 김승하님은 전기공사를 하는 분이 아니고 회사에 다니는 분이다.

주말이면 그 황금주말을 기꺼이 산골의 집짓는 일에 희생하였고, 그 공사가 끝나고도 물공사니, 전기공사니 산골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달려와 주었던 사람이다.

달길님의 부인(달의 노래님)도 같은 과다.

전화가 왔기에 이거 주말에 남편을 이렇게 불러내어 어쩌냐고 미안해 했더니 본인이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뭐...하면서 마음쓰지 말라고 웃는다.

어느 주부가 남편이 주말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고 남의 집 일에 달려가는 것을 무조건 달가워 할까.

그런데도 남편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 자기도 괜찮다고 진심어린 마음을 써주니 고마운 일이다.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정말 맞다고 또 한번 생각하는 대목이다.

난 집에서 저녁 준비를 하다가 내려가 보았다.

두꺼비집을 내리고 전기공사를 해주고 있는 달길님께 가서 고생한다며 하는 말이 "달길님, 어둡게 일하시네. 내가 두꺼비집 올려줄께요." 그 말을 하고 나서 나도 웃고, 초보농사꾼도 웃고, 김승하님도 웃었다.

전기공사를 하니 당연히 전기를 내리고 하는 것인데 난 순간 어둡다고 전기를 켜준다고...

그러면서 이내 "아이고 두꺼비 집을 내렸지 참, 올리고 켜드려야지^^..."

"아이고, 참아주세요" 하며 웃는 사람

올리고 켜면 전기공사하는 사람이 어찌 되겠는지...

김승하님(달길님)은 초보농사꾼의 가려운 곳을 다 긁어준 후 가져온 도구와 재료를 정리한다.

그리고는 산골에 필요한 재료를 이것 저것을 고른 다음 산골에 필요한 것이라며 산골에 두고 쓰라고 챙겨준다.

전기 공사를 다 끝내고 저녁을 먹기 위해 집으로 올라와서도 우리 집의 이것 저것을 체크하는 사람.

우리집의 기초 공사, 설비를 다 담당했고, 시골의 물공사와 기타 전기공사도 다 내집처럼 해준 사람이라 솔직히 초보농사꾼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집처럼 형님 뭐는 청소했어요? 뭐는 어떻게 했어요? 하고 이것 저것 체크하고 관리가 미비한 것은 손으로 다 챙겨준다.

이거 누가 주인인지...

언제나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다.

저녁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서로 삶을 보는 방향도 엇비슷하여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김승하님도 우리처럼 이 울진이 고향은 아니다.

그러나 고향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잔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이다.

울진에 발붙인지는 달길님이 우리보다 훨씬 선배다.

그러니 타향살이처럼 등이 시린 것도 서로 잘 알고, 제2의 고향이 되어 잔뿌리 내리고 살아가는 과정도 서로 같다.

그러다 보니 울진사람이 다 되어 울진하면 하나하나 깊은 정을 느끼는 것도 서로 같다.

이처럼 사연이 같은 사람끼리는 눈동자만 봐도 뭐가 아쉬운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어둠이 쫙 깔린 시간, 달길님이 이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동을 건다.

산골의 차가운 공기가 그 진동으로 차에서 떨어진다.

별들이 총총 박힌 하늘 아래 차 하나가 미끄러지듯 산골을 빠져나간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 많이 피곤할텐데...

난 과연 다른 사람의 가려운 등을 얼마나 긁어주며 살고 있을까.

오히려 내 등만 가렵다고 드미는 삶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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