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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버지

닉네임
kimdolls2
등록일
2003-06-24 19:33:10
조회수
279
아버지

밤 늦게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손에는 가끔씩 먹을것이 들려 있었습니다.

군고구마 봉지, 풀빵 봉지...추운 겨울 밤 안주머니 깊이 먹을것을 집어넣고

골목길 불 켜진 창문을 향해 걸어오시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코끝이 시큰해집니다.

그 따뜻한 기억들이 가슴속에 고스란히 봉지째 남아 훈훈한 겨울

가난하던 그 시절 아버지는 혼자 힘으로 많은 식구둘을 먹여 살리셨습니다.

온 가족들이 모여 잠든 단칸방으로 늦은 밤 돌아오시던 아버지는

그래도 가난에 힘들어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밥상을 물리고 잠든 우리들 머리맡에 뒤돌아 앉아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는 등이 넓으셨습니다.

그만큼 외로우셨을 아버지.

언제나 무뚝뚝하고 엄했던 아버지였지만 가끔씩 술에 취하면 기분이 좋으셨습니다.

그때마다 별로 잘한 것도 없는데 칭찬을 해주시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던 아버지.

그 틈을 타서 막내는 아버지 무릎에 기대어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고,

바로 아래 동생은 숙제장에 쓴 글씨를 자랑하기도 했지요.


어렸을 적 우리는 혹시 아버지가 군것질 거리를 사 오시지는 않을까 기다리다가

잠이 든 적이 많았습니다. 자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부스스 눈을 뜨면, 빙그레 웃으며

"이 녀석 아짐 잠이 덜 깼구나" 말씀하실때 방 안에 퍼지던 술 냄새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빈손으로 들어오시는 날이 더 많았지만 아버지가 먹을 것을 사 들고 오시던 밤은,

조금이라도 서로 더 먹으려고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드셔보라 소리 한번 안 하고 우리끼리만 먹어도 늘 모자랐던 시절.

"아버지는 술 마셔서 단 것 싫어한다. 나는 담배나 피울란다."

고모가 미군 비상 식량인 소고기 통조림과 초콜릿을 들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먼저 드리라는 고모의 말에 아버지는 마다하시며 담배만 피우셨습니다.

풀빵보다 더 맛있던 통조림과 초콜릿을 그때 우리는 정말 아버지가 싫어하시는줄 알았습니다.

먹는다는 것, 자식들을 먹인다는 것, 그건 단지 기쁘고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을 테지요.

그래도 아버지는 늘 먹는 우리들 앞에서 흐뭇해 하셨습니다.

추운 들판에서 날아다니며 가까스로 구한 먹이를 물고 둥지로 돌아가는 날짐승처럼,

그렇게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야생처럼 생존의 들판에서 추위와 고단함을 견디는 것이겠지요.

먹기 위해 살았던 시절, 먹는 것이 그 무엇보다 숭고했던 시절, '밥 먹었냐?' 는 인사말이 주는 눈물겨움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묵묵히 삶의 무게를 견디던 넓은 어깨와 쓸쓸한 뒷모습이 떠
오릅니다.

단칸방을 밝히던 삼십 촉 전구 불빛 아래 모인 따뜻한 봉지의 기억과 습쓸한 아버지의 담배 냄새가 함께 떠오릅니
다.

아버지의 고동색 단벌 양복에는 늘 찬바람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버지가 다니시던 세상이 그렇게 차가운 줄 몰랐습니다.

어느 날 찬바람과 함께 아버지가 옆구리에 끼고 다니시던 봉투 속에 도시락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양복 윗도리를 벗다가 떨어진 봉투에서 빈 도시락이 보였을 때 그렇게 넓었던 아버지의 등이 왜소하게 느껴졌습니
다.

밖에 나가 늘 잘 잡수신다던 아버지가 김치만 담은 찬 도시락을 드신다는 사실이 어린 마음에는 당황스럽게만 느껴
졌던 겁니다.

달그락 거리던 아버지의 도시락, 꼭 한 번 아버지의 고동색 양복이 남루해 보이던 적이 있었습니다.

옆구리에는 빈 도시락 봉투를 끼고 한쪽 가슴에는 먹을 것을 품고 골목길 불 켜진 창문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오시던 아버지의 가슴은 따뜻하고 또한 추웠겠지요.

이제는 잠 안들고 깨어 아버지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건네 주시던 따뜻함만이 아니라 빈 도시락의 쓸쓸함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성일:2003-06-24 19:3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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