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정면 백암산 정상을 지나 신선계곡,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이번 산행은 명산인 백암산(白巖山,·1004m) 정상을 거쳐 군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신선(神仙)계곡이다. 3월 9일, 9시부터 산 들머리로 스며들듯이 올라 오후 4시 40분경 신선계곡의 입구로 나왔다.

이날 산행은 평해농협에 근무하는 손승열(57세) 상무를 길잡이로 전종석 홍양기씨, 본지의 전석우 기자를 포함 5명이 함께 한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날은 봄기운이 완연해 초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위가 있었다. 계절의 흐름에 비해 봄이 성큼 한 발자욱 앞선 날씨였다. 대구 등 일부도시에서는 한낮의 온도가 28도씨를 육박해 자동차의 에어콘도 가동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때(계절)를 먼저 알아차린 초입의 생강나무는 노란 꽃망울을 수줍게 터뜨리고 있다. 바위틈을 흘러가는 물이 계절이 봄으로 내달리고 있음을 말해준다. 일행도 봄의 산행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눈앞에 펼쳐진 하늘은 가을하늘처럼 투명하다. 하늘색이 너무 곱고 푸르러 눈이 시리다. 백암산 입구에서 정상이 눈 앞 가득 다가온다. 손에 잡힐 듯하니, 훌쩍 날아오르고 싶다. 그렇지만 역시 한발 두발 땀 흘려 걸어 올라야 한다.


몇 년 전 처음 백암산을 찾았을 때의 느낌은 ‘푸근함’이었다. 그 느낌을 간직하면서 산에 오른다. 얼마나 많은 발걸음들이 더해져야 하나... 산은 그대로인데, 내가 나이 먹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힘이 든다고 투덜거린다. 몸이 술과 스트레스, 나이로 인한 체력저하, 이것도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르다고 위안한다. 산은 그 길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여기에 오르는 사람들만이 불평한다.

산은 그 길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왜 힘이 더들지?’한다.

앞장 선 손승열 상무가 백암폭포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경쾌하게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린다. 몸과 마음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몸은 오르막이 나오면 금새 반응한다. ‘헉헉’거린다.

나무와 숲이 만들어 내는 바람소리는 시원하다. 한겨울의 바람소리와는 느낌이 다르다. 그리고 피부로 느끼는 감촉도 다르다. 시원(始原)에 대한 그리움, 바람은 산이 만들어내는 생명의 소리다.


지난 아구산에서 봤던 소나무들처럼 백암산의 소나무들도 송진을 얻기 위해 상처난 몸둥이를 그대로 부둥켜 안고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미안하고 고맙다.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백암폭포에 도착했다. 폭포수가 시원하게 떨어진다. 골골이 쌓여 있던 물이 더하고 더해서 저 힘찬 물줄기를 만들었다. 폭포수 밑에서 좌선하며 득도(?)하고 싶은 것은 나만 가지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눈 녹은 물은 차다. 시원하게 속으로 맘껏 소리도 질러본다. 안내판에 백암폭포는 ‘해발 400미터에 위치하며 폭 25미터, 높이 30미터의 2단 폭포’라고 설명하고 있다.


백암폭포를 지나면서는 본격적인 오르막이다. 가쁜 숨과 조금씩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20여분간 올랐다. 탁 트인 전망이 좋은 곳에 묘를 만났다. 풍수를 모르는 사람이 일견 봐도 명당이다. 풍광이 시원하다. 묘자리에 대해 일행들이 한마디씩하고 새터바위에 올랐다. 새터바위는 해발 550미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위 아래 새들이 서식하고 있다. 바위에 올라서면 건너편 백암의 강인함과 그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금강송의 굳건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다시 10분 정도 오르막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나무도 더듬어 가며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다 백암산성의 흔적을 만난다. 눈여겨보면 기와 조각을 쉬이 찾을 수 있다. 잠깐 여장을 풀고 사과와 김밥을 간식으로 먹는다. 그렇게 사과가 맛있을 수가 없다. 등으로 시원한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손승열 상무는 눈 감고 백암산 등산로를 그릴 정도로 훤하다고 한다. 그만큼 이산을 많이 다녔다는 것. 그런 그도 이날 몸이 제 컨디션이 아니라 무리하고 지나치지 않으려고 한다. 백암산은 자신이 어렸을 때도 산이 무성했다고 한다. 울진읍과 비교하면 상반된다. 나의 사촌 형님이 가난한 시절 새벽 일찍 눈을 뜨자마자 빈속을 달래고 연지리에서 신림리를 거쳐 몇 십리나 되는 아구산까지 나무를 하러 다녔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런 반면 온정면 일대는 백암산뿐만 아니라 주위의 산들이 많아 그만큼 나무가 무성했다는 것일까...


10시55분경 백암산성에 도착했다. 백암산성의 흔적은 안일왕산성에 비해 흔적이 뚜렷했다. 동행한 일행들은 백암산성 당시 백성들의 피땀을 더듬었다. 어디에서 이 많은 돌들을 지어 날랐을까? 생존을 위해 맞서 싸웠을까? 오로지 맨손과 맨몸으로 이 성을 만들었을 백성들의 힘겨움이 눈물겹다. 이제는 흔적만 남기고 있다. 이곳이 산성이 있었다는 흔적만을 그 앞에서 아픔과 슬픔, 힘듦을 공유한다.

안내 간판에는「백암산성은 백암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해발 665~800미터 고도에 위치한다. 이 산성은 석성으로 축조됐으며 내성(1,225.5미터)과 외성(391.7미터)으로 전체 길이가 1,617.2미터이다. 문헌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쯤 축조돼 조선 초에 그 기능을 잃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해오는 구전으로는 신라시대 때 구대림(丘大林) 황락(黃洛) 두 장군이 축조한 석성으로 신라왕이 왜란을 피해 이 성에 머물렀으며, 고려 공민왕도 난을 피해 잠시 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백암산 남동쪽 계곡의 이름은 ‘모르시골’인데 왜구들이 이 계곡을 통해 몰래 백암산성으로 진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는데, 적이 온 줄도 몰랐다고 한데서 연유해 ‘모르시골’로 지금도 불리고 있다.」고 설명한다.

백암산성에서 고개를 들어 맞은 편 능선을 바라봤다. 나목 아래로 하얀 선이 이어져있다.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바다의 하얀 파도의 포말처럼 느껴졌다. 산에서 바다를 만난 듯하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과 조화를 이룬다. 그 속에서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들이, 떨어져서보면 마음속에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 같다. 바위 위 척박한 곳에 뿌리를 박고 생명을 틔우는 소나무의 열정(?), 그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일까?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앙상한 나목들이 지천이다. 어디에도 생명이 없을 것 같은데, 그 속에 생명들이 속삭인다. 철쭉군락지를 지나 백암산을 이름 짓게 한 ‘흰바위’로 향한다.

백암산의 의미를 우리말로 풀어보면 ‘흰 바위 산’이 된다. 이는 정상부 남동쪽 아래 사면의 바위지대에서 유래했다. 회색의 이 바위벽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모습을 보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것이 나중에 변화돼 백암이 되었다고 알려진다.

11시반경 흰바위에 섰다. 시야가 탁 트이며, 낙동정맥이 내달린다. 한참을 조망하며 풍광을 즐겼다. 급할 것은 없다. 천천히 자신의 발걸음에 맞추다보면 일행들의 발걸음도 어느새 비슷해진다. 엎치락뒤치락이 아니라, 자신의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그렇게 함께 갔다.

그렇게 다시 10분여를 걸어 11시 45분경 정상에 도착했다. 저 멀리 영양의 일월산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마주보고 있다. 생각보다 정상에서 만난 사람들은 적었다. 울진막걸리로 정상주를 기념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저 멀리 힘차게 뻗고 있는 낙동정맥의 생생한 기운을 안주로 삼는다.

산이 주는 넉넉함과 포용력은 대단하다. 손승열 상무와는 초면이지만, 산에서 같이 땀을 흘린다는 이유 그 자체만으로도 서로를 격려하고 성원한다. 일상에서는 부족한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여유를 맛본다. 아침나절의 또렷했던 시야가 날씨로 인해 뿌예졌다. 그래도 후포항과 동해가 한 눈 가득이다.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나풀거리며 정상 표지석에 앉는다. 오늘 날씨가 얼마나 따뜻한가를 나비가 직접 얘기해 주는 것 같다.


정상 능선을 따라 산성처럼 줄이어 있는 눈(雪). 바람이 눈을 몰았을까? 눈이 두껍게 자리 잡고 있다. 과장을 보태면 만년설 같아 조금은 신기했다. 정상 능선을 따라 한참을 이어져 있다. 그 눈은 뭇 생명들의 생명수로 싹을 틔울 수 있게 도울 것이다.

일부러 눈길을 밟는다. 무릎까지는 족히 빠진다. 그래도 이 봄에 다시 이런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는 그럴싸한 변명(?)으로 눈길을 걷는다. 정상에서 20여분을 내려가 오늘의 또 다른 목적지로 갈라지는 선시골(신선계곡)의 이정표 앞에서 점심을 먹었다. 가져 온 음식을 같이 나누며, 반찬이 김치 하나라도 족하다. 시장이 반찬인데,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산에 다니는 즐거움 중에 하나가 이런 식도락(食道樂)이다. 무엇이든 맛있다. 이날 점심을 좀 짜게 먹어서 그런지, 1.8리터 물병 2개를 산을 내려가는 동안 부지런히 마셨다. 그런 갈증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비경에 대한 목마름도 한몫했을까?

한편 백암산 등산 조난자 구호지점을 알리는 간판들의 글씨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색바랜 채로 미관을 어지럽힌다. 긴급상황 발생시 긴요하게 쓰일 수 있는 것에 대해 너무 안일하다. 이를 만들게 한 기관이나, 이를 만든 업체나,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이다. 그 순간만 넘기자는 얄팍한 수가 보인다.

다시 여장을 꾸린다. 1시에 출발. 선시골로 가는 길은 그늘이어서 그런지 눈이 그대로 남아있다. 5분여를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조심스레 걸었다. 그래도 미끄러진다.

50여 분간을 부지런히 내려갔다. 이 길은 손 상무를 제외하곤 일행들이 처음이다 보니 소나무 앞에서 자주 발걸음이 멈춰진다.


소나무의 원형(原型)을 만났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이리 틀리고 저리 틀리고, 가지들은 한결같이 남쪽을 향해 생명의 나팔을 부른다. 눈에 들어오는 소나무가 한 두 그루가 아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지만, 잡목들이 우거져 기대한 만큼의 사진을 통해 그 맛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역시 그 맛을 잡아내지 못했다.

사람의 손길이라고는 전혀 닿지 않은 세월의 풍상을 자연이 만든 그대로의 모습이 아닐까. 구부러지고 부러지고, 말라비틀어지고... 그 모습에서 역동성과 생명의 강인함을 배운다. 이야기 하고 싶었다. 상처난 소나무의 몸을 내가 마음으로 어루만져 주고, 나 역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 받고 싶어 부둥켜안고 잠깐 동안 교감한다. 지난날의 아픔과 나의 현재의 아픔을 토닥여주고 감싸 안아 준다.



세월이 그대로 묻어나는 소나무가 있는 반면에 30미터는 족히 넘을 금강송이 시원하게 뻗어 있다. 미인의 다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금강송은 미끈함을 도발적으로 과시하고 있다. 몸 역시 빨간 색으로 도발적인 유혹이다. 안고 싶다. 서면 소광리의 금강송 군락지에 못지않은 울진금강송의 아름다움 매력이 흠뻑이다. 이곳은 소광리처럼 관리가 되지 않았는데도 금강송은 제 모습을 그대로 뿜어냈다. 잡목을 제거하고 관리만 한다면 수십 년 후에는 재목으로 쓰일 금강송이 부지기수다. 한편으론 관리를 하는 것이 이 소나무들을 위해서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선뜻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1시50분경 신선계곡의 상류인 합수(合水) 지점에 도착했다. 배낭을 벗고 손을 담근다. 손이 시릴 정도는 아니고 알맞게 차다. 얼굴을 씻고 입안 가득 물을 삼킨다. 속까지 시원하다. 힘듦도 아픔도 복잡한 마음도 이 물에 같이 씻어 보낸다. 신선이 놀았을 계곡물은 속세의 번뇌를 가득 안고 흐른다.


내선미천은 백암산 북쪽에서 7.5㎞ 길이다. 골짜기 전체가 거대한 암반으로 이뤄진, 보기 드물게 깨끗한 바위골짜기다. 들여다보는 이의 마음까지 투명하게 맑혀주는 짙푸른 물웅덩이(소)와 크고 작은 폭포들이 촘촘히 깔려 있다. 오염원도 없고 찾는 이도 드문, 이른바 ‘덜 알려진’ 골짜기다. 신선들이 노닐 만한 경치라 하여 ‘신선골’로도 불린다.

손 상무의 안내로 상류로 10분을 올라 화전민이 거주했던 ‘독실마을’에서 집의 경계가 됐던 돌담과 성황당 흔적으로, 당시 여기에서 지난한 가난을 이기기 위해 몸부림쳤던 화전민들의 삶을 더듬었다.

■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합수 지점에 배낭을 벗고 간편한 복장으로 손승열 상무의 안내를 받으며 ‘독실마을’로 올랐다. 10여분을 오르자 사람이 살았을 흔적이 있었다. 손 상무는 “몇 십년 전에 친구 아버지가 여기에서 살았다. 여기에서 외선미까지 족히 2~3시간은 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살았는지...”라며 잠깐 회상에 젖는 듯했다. 그리고 몇 년 전까지 스님 한 분이 기거했다는 집의 용도로 쓰였을 자재들이 쌓여 있었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계곡의 한쪽에는 집의 경계로 삼았을 돌담들이 남아 있다. 성황당이 있었던 자리에는 거목(巨木)이 잔해를 남기고 있었다.

독실마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울진읍에서 우연히 만났다. 김대열(울진읍, 67세)씨는 1968년 12월 당시 분대장(계급 하사)으로 무장공비 토벌을 위해 이 마을을 지나 봉화 춘양기지까지 갔다고 했다. 당시에도 소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었고 뚜렷한 길이 없어 오솔길과 계곡을 번갈아 가며, 길이 미끄러워 군화에 새끼를 얽어매고 겨우 화전민 마을에 도착했다고 한다. 집의 규모는 작고 초라했으며, 입구는 가마떼기로 걸쳐 놓은 상당히 열악한 상황이었다고. 사람들의 얼굴색도 제대로 못 먹어 핏기가 없고 누런색이었고, 집집마다 제사를 모시고 있었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여기에 살던 화전민들을 울진읍으로 소개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지금도 읍내3리(월변) 노인복지회관 인근에는 소개령으로 이주한 주민들이 살았던 건물이 있다.


기록과 인근 주민들에 따르면「선시골 상류 쪽은 독실(독곡)이라 부른다. 1960년대까지 화전민 30여호가 살고 있었다. 50~60년대엔 마을 동장이 술 받아 지고 올라가 동회의를 독실에서 열었다. 60년대 말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소개령이 내려져 터만 남게 됐다. 몇 년 전까지 너와집 한 채가 남아 있었으나, 이마저 헐렸다. 희미하게 남은 산길은 독실마을 주민들이 평해 오일장에 나물 버섯 메밀 도토리 장작 등을 내다 팔고 소금과 해산물을 사올 때 오고가던 길이다. 구한말엔 항일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왜병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뒤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전열을 가다듬던 곳」이라고 전한다.

합수 지점으로 다시 내려오는 길에 산개구리 알을 봤다. 자연은 그렇게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리고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신선계곡 전역의 바위와 돌들이다. 이 모두에는 작은 돌들이 박힌 모습이다. 이는 신생대에 용암이 흘러나와 다른 돌들과 섞여 형성된 화성암 지대라고 한다. 돌이 자연스레 빚어 놓은 추상화라고 할까? 신기함이 신선계곡을 내려오는 내내 가시질 않았다. 바위마다 다양한 추상화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아직은 찾아오는 이가 더불어 원석(原石)같은 비경에 탄성이 절로 나게 한다. 인간이 창조해낼 수 없는 자연의 경이 앞에 선 장탄식만이 흘러나올 뿐이다. 신선 계곡을 따라 세월이 만든 물의 힘! 바위의 형상을 만든 물의 힘. 멀리서 바라보는 계곡의 물은 명경지수(明鏡止水) 그 자체다. 고이면 고인 대로 짙푸르고 흐르면 흐르는 대로 투명하다. 물이 그대로 계곡을 비추고 산을 담는다.


신선계곡은 계곡 거의 전체가 거대한 암반이고 아기자기한 소와 바위의 연속이다. 좁고 긴 골짜기여서 폭포나 물웅덩이는 대체로 규모가 작은 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물살에 깎여 만들어진 바위 소들은 검푸른 빛을 띨 정도로 수심이 깊은 곳이 많다. 소가 조그마한 것까지 100여개는 훨씬 넘는다. 용소, 가매소, 매미소(마음소), 호박소(함박소), 숫돌바우(선돌바우) 등 이름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선인들이 거닐고 오지 산행꾼들이 찾던 신선계곡이 탐방용 나무데크 설치가 최근 완료됐다. 골짜기 깊숙이까지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나무계단과 출렁다리가 걷는 이에게 편안함을 주지만, 기우가 앞선다. 일부에서는 이를 청정 골짜기의 자연환경 파괴를 앞당기는 실마리로, 어떤 이들은 훼손을 최소화하며 경관을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유용한 편의시설로 이해한다. 아직은 덜 알려져 찾는 이가 적지만, 입소문을 통해 무지막지한 사람들 앞에서 신선계곡은 그 모습을 얼마나 굳건히 지켜갈 수 있을까?

개발을 했으니 지켜내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훼손이 되면 원상으로 복구하는데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소모됨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새로이 조성된 데크를 따라 내려온 지 1시간. 길 바로 옆에 깡통의 무덤(?)이 눈에 띄었다. 지난날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상처를 입히고 걸어뒀던 것이라고 전종석씨는 설명했다. 인간의 무자비한 탐욕을 보여 준 녹 쓴 깡통들... 뭐라 할 말을 잃었다.


한편 선시골 입구엔 일제강점기부터 아연을 생산하던 광산(금장광산)이 있었다. 비포장도로 끝 부근이다. 광산 덕에 일제강점기에 이미 내선미마을(선구1리)엔 전기가 들어왔다. 50년대엔 주민·광원 1천여명이 마을에서 들끓었다고 한다. 음짓마(음지쪽에 자리 잡은 마을)에 사택들이 줄지어 들어섰는데, 동네 이름을 아예 ‘사택’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20여년 전까지도 광산이 운영됐고, 사택 건물 일부가 남아 있다. 폐광된 뒤 광산할 땐 씨가 말랐던 물고기들도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광산의 벽에 금강송을 그린 길이 200미터의 초대형 벽화가 탐방객들을 맞는다.

노자 도덕경 78장에는 천하막유약어수 이공견강자 막지능승 이기무이역지 약지승강 유지승강 천하막부지 막능행(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 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弱之勝强 柔之勝剛 天下莫不知 莫能行)이라고, 풀이하면 “세상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게 없지만 단단하고 강한 것을 치는 데는 물을 이길 만한 것이 없나니, 무엇으로도 물의 성질을 바꿔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긴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능히 그대로 행하지는 못한다.” 또 도덕경 8장에는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가 있다. 물처럼 사는 인생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물의 선함은 만물을 이롭게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며 물의 덕성을 상찬했다.


물이 빚어낸 신선계곡의 비경, 아! 낙동정맥의 힘찬 푸르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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