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고향을 지키며 전복, 성게와 함께 반평생을 살아온 기성면 기성리 동영수산 박병주(63세)사장.

"성게는 울진의 특산물로 가장 적합한 품목입니다. 성게가 국내외에서 히트상품이 될 날이 멀지 않았어요." 성게와 함께 반평생을 보낸 성게 예찬론자 박사장은 전복, 성게에 관한한 울진에서 1인자다.

4인 목도로 바위를 날라 바다를 막고 전복의 저장을 시도했었다는 박병주 사장의 전복, 성게와 함께한 30년간의 고생담을 들어보았다.

3공화국 시절에 청년기를 보낸 박사장은 군복무를 마치고 하급선원으로 원양어선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박사장은 불안정한 하급 기관원생활을 2년만에 청산하기로 마음먹었다.

선원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갈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당시에는 선원수첩 받기가 그리 만만치 않은 터라 진로에 대한 망설이고 있던 터에 부산자갈치 시장을 오가며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전복.

값을 물어보니 당시 돈으로 kg당 1천8백원이라는 가격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놀라 다시 물어보니 차림세가 전복을 살 것 같지 않았던지 무시하고 말더란다.

"고향 기성엔 늘린게 전복인데... 그 전복을 이 곳까지 살려 올 수만 있다면 난 부자가 되겠구나"하는 생각에 곧바로 원양선원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인심 좋은 고향 기성에 돌아온 박사장은 됫병 소주 서너병으로 잠수부에게 부탁해 전복을 구한 뒤 "숯을 넣어 전복을 보관하면 오래 산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따라 시간을 다투어 부산 자갈치시장으로 달음박질쳤다고 한다. 그렇게 부산을 두 번 오가니 당시 공무원 한 달 치 봉급이 수입으로 떨어지더라는 것이다.

자신감을 얻은 박사장은 수송이 어려워 판매가 어렵다던 전복과 성게를 수집하고 가공하는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하지만 전복과 성게를 상품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지역여건상 누구에게도 올바른 조언을 들을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자 박사장은 전문서적을 뒤져가며 혼자서 연구를 거듭했다.

박사장은 바다를 막아 성게를 살리기로 마음을 먹고 큰 바위를 옮기는 고생 끝에 수족관을 만들었으니 아마도 울진 축조식 양어장의 시초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기성면 사동리에 위치한 박사장의 양어장에서는 좋은 품질의 전복과 성게가 생산됐으나 막상 본격적인 출하를 하고 보니 대부분의 이윤이 중간상인에게 들어가는 것 같아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박사장의 부인은 사동에서, 자신은 기성에서 가게를 열고, 자전거를 타고 물건을 날랐다는데, 그 당시를 회상하며 박사장은 "그 때는 희망이 있었고, 젊음과 힘이 있었다"고 말한다.

"성게는 고단백식품으로 영양가가 매우 높아 관절염과 결핵에 좋고, 병 후 회복식품으로 효과를 본 사람이 많다"며 성게예찬론을 펴는 박사장은 "예전에는 전량 일본으로 수출 되었지만 러시아산, 중국산이 보급되면서 수출수요가 격감하는 추세라 서울, 제주도 등의 고급음식점에 납품을 늘리는 등 내수시장을 공략하고 있다"고.

울진군에서는 유일하게 경상북도로부터 전통가공식품 허가를 받아 성게 가공업을 하고 있는 박사장은 "성게를 특산품화 해야 한다"며 "성게의 영어 이름이 ur-chin(얼-친)이라 uljin(울진)과 흡사한 것도 좋은 매개체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성게 홍보관과 대규모 판매장을 건설할 각오로 후포에 부지를 매입했으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로 지금은 중단한 상태고, 사업을 이어받을 아들의 몫으로 넘겼다"고 한다.

한편 박사장의 아들 박영규(32세)씨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호주에서 IT산업을 전공했으나, 호주유학시절 현지에서 본 최신식 양식시스템과 양식사업의 장래성에 매료돼 아버지의 뒤를 잇기로 했다고 한다.

아들 박영규씨는 "성게와 전복을 통한 다양한 제품개발을 시도하고 마케팅전략을 다각화해 ‘울진 특산품 성게’로 아버지의 꿈을 반드시 이루어 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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