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마가 할퀴고 간 하천의 다리 아래에서 햇볕에 그을린 할머니가 주먹밥으로 늦은 점심을 들고 있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 황폐해진 들녘에서 한 줌 곡식이라도 더 건져 보려고 하루종일 홀로 애써 본다.

산사태로 길이 막혀버린 왕피리 도로, 진흙탕으로 변한 논에 애처롭게 서 있는 수곡의 노부부, 폐허로 변한 성류굴 입구, 다리는 끊어지고 교각만 앙상하게 남은 불영계곡, 도로는 군데군데 끊어지고 붕괴되었고, 시멘트 포장길은 흔적도 없다. 추석에 찾았던 고향에서 전해오는 풍경들이다.

필자는 태풍 매미가 도착하는 시각에 고향에서 일터가 있는 부산으로 돌아왔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는 방향을 잃은 바람을 타고 하늘로 다시 올라가고, 가족을 태운 차는 금새라도 폭우에 휩쓸려 버릴 것만 같았다. 겨우 도착한 도시는 정전으로 칠흑같이 어두웠고, 신호등이나 간판은 폐허가 되어버린 거리를 어지러이 뒹굴고 있었다. 1959년 9월 17일, 태풍 사라가 울진을 강타한 추석날 아침에 태어난 필자는 44회 생일을 맞아 저 세상에 온 느낌이었다.

태풍 매미는 120여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4조원이 훨씬 넘는 재산피해를 가져왔다. 작년 태풍 루사에 이어 울진도 다시 600억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태풍 사라가 언제적 이야기인가? 반세기 전에 일어났던 자연재해의 역사는 오늘도 되풀이되고 있다. 적잖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막대한 재산피해가 매년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자연재해의 희생자는 대부분 농어촌이나 도시의 취약지구에 살고있는 사회적 약자들이라는 점이다. 작년의 피해가 채 복구되기도 전에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재산마저 태풍에 날려버린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웃 일본은 잦은 태풍에도 우리처럼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있다. 얼마 전 강력한 허리케인이 휩쓸고 간 미국도 인명피해는 몇 명에 그치고 재산피해도 우리의 절반에 못 미치고 있다. 알프스산맥 주변 유럽국가의 작은 도시들도 가끔 폭우로 수해를 입지만 매년 동일한 지역에 같은 피해가 반복되어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기본 인프라가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다리나 도로라면 또 건물이라면 웬만한 재난은 마땅히 감당해야하는데, 우리가 지은 것들은 몇 년을 버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개발을 위해서 나무를 베고 물길을 막으며, 바다를 매립하여 파도가 오는 길도 차단한다. 자연을 오염시켜 이상기온현상도 초래하고 있다. 자연을 역행하고 오염시킨 결과, 자연재해는 매년 더욱 커지고 있는 것이다.

우선 이번 태풍의 복구부터 꼼꼼하게 하자. 어설픈 땜질복구로는 매년 같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개발과정에는 과학적인 기법을 도입하고 전문가의 검증도 거쳐야 하며, 충분한 시간도 들여야 한다. 시설기준을 더욱 엄격히 하여 웬만한 자연재해에 견딜 수 있는 시공을 해야 한다. 정부는 재난시스템을 가동하는 등 소프트웨어적인 면에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도로, 교량, 철도, 전력, 항만, 주택 등 하드웨어적인 기본 인프라를 안심할 수 있는 수준으로 향상해야 한다.

정보화와 세계화의 진전으로 빈부의 격차가 확대되고 있는 요즘이다. 태풍 매미와 같은 자연재해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더욱 궁핍하게 할 것이고, 우리는 언젠가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내년에도 또 다른 사라와 매미가 찾아올까 걱정스러운데, 호미를 들고 황폐한 들판에 홀로 선 할머니가 자꾸만 떠오른다.

전현중은 울진읍 월변마을 출신으로 프랑스 파리 1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부산 동서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및 동서대학교 중앙도서관장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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