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사람으로 백암산에 한번 가 봐야한다고 벼르다가 올해 처음으로 갔다 왔다. 영덕에 있는 질녀 내외와 같이 동행하였다.

우리는 출발부터 길가에 너부러진 야생화에 눈이 팔리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 향유꽃은 은은한 빛깔에 독특한 향내가 났다. 주위에서 “나도 향이 좋은 꽃”이라고 웃음 치는 산국을 지나칠 수 없었다. 흰색과 연분홍의 구절초는 며칠 전 야생화 전시회에서 본 것 보다 한결 생기가 나고 곱게 보였다.

소나무 밑 응달에 군락을 이룬 며느리밥풀 꽃, 살새, 억새, 둥글레, 까치수염, 노루발, 병조회 풀, 투구꽃, 산부추, 누리짱 나무의 붉은 열매, 낮에만 피는 귀한 용담까지 사람의 눈을 쉬지 못하게 하였다. 옷 나무의 단풍은 유독 아름다웠다. 아름답고 예쁜 꽃들이 같이 놀자고 졸라서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산을 오르는데 야생화는 계속 눈에 들어왔다. 우리 숙질은 꽃을 들여다보며 사진 찍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노루오줌, 노루발, 우산나물, 천남성, 정영엉거퀴... 등 셀 수 없을 만큼 새로운 꽃이 나타났다. 가끔 다람쥐가 사람을 보고 쏜살같이 달아났다. 그들의 재롱을 보고 싶은데 사람이 많이 오니까 귀찮은가 보다. 산새도 보고 싶은데 모두 낮잠을 자는지 보이지 않았다.

등산로는 가파르지 않았다. 건너 산자락에 부드러운 단풍잎이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였다. 백암산은 넉넉하고 후덕한 마님이 등산객을 당겨주고 밀어주는 푸근한 산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따라 산을 오르는 사람은 계속 줄을 이었다.

조금 더 오르니 소나무 군락은 지나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금강송 숲이 나타났다.

그 나무 숲 속을 걷는데, 소나무 밑둥치에 V자 모양으로 나무껍질을 벗긴 자국이 여러 군 데 보였다. 송진을 채취하던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질녀가 안내하는 곳으로 갔더니 송진을 채취하던 깡통이 쌓여 있었다. 깡통은 발갛게 녹슬었고, 불에 탄 종이처럼 쉽게 부서졌다. 전쟁 준비에 미쳐 남의 나라 국민에게 송진을 채취해 오라고 가가호호에 일정량을 배정하여 착취하던 현장이다.

주먹이 쥐어지고 심장이 상한다. 나무들은 그 상처 때문에 고생이 오죽하였을까. 이런 곳은 산 교육장으로 만들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시간 정도 걸려서 정상에 도착하였다. 그 곳에는 50여 평되는 헬기장이 닦아져 있었다. 먼저 흰 배가 유유히 떠 있는 동해가 한 눈에 들어왔다. 평해 남대천, 월송정 송림, 구산 항구도 보였다. 정 동쪽으로 남아실, 그 앞에 기린봉, 저 멀리 마룡산이 또렷이 나타났다. 나는 낯선 사람에게 저기 마룡산 너머 조그만 등대가 보이는 곳이 후포항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우측으로 방향을 돌리니 조금리 앞개울이 선명하고, 삼림이 울창한 칠보산이 검게 보였다. 서쪽으로 군사 시설이 있다는 일월산이 펑퍼짐하게 앉아 있었다. 그 앞으로 엷게 화장한 금마산과 금정산이 "나도 산"이라고 해죽이 웃고 있었다. 북서쪽의 나무들은 남동쪽의 나무보다 키가 작았다. 설악산 대청봉처럼 북서풍이 강하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정상으로 올라올 때 지나온 능선은 말의 등을 닮았다. 황금 빛 가을 옷을 입은 믿음직한 말 한 마리가 선시골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구주령으로 굽이굽이 넘어가는 고갯길은 실개천 같은 선을 그리고 있었다.

날씨가 맑고 하늘이 높아 시야가 넓게 펼쳐졌다. 백두대간을 잇는 높고 낮은 산과 푸른 동해 바다가 새롭게 보였다. 우리 고장 울진에 먼 곳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산이 있어서 자랑스러웠다. 각 고장 사람들이 자기 고장의 명산을 자랑거리로 내세우며 알뜰히 가꾸듯이 우리도 백암산을 아끼고 가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정상에서 흰 바위를 지나 백암폭포로 내려 왔다. 이백여 미터 내려오니 흰 바위가 있었다. 내가 올라서서 발을 굴러 보고 싶었던 바위는 아니었다. 바위가 매끄럽지 않고 굵은 돌과 작은 돌로 모자이크하여 둔 것 같았다. 너무 비탈진 바위라 사람이 범접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 바위에 발을 디뎌보려고 내려가는데 질녀가 잡아당기며 말렸다.

내려오는 길옆에 흰 바위가 잘 보이는 곳이 있었다. 거기서 쳐다 본 흰 바위는 둘레가 넓었다. 아주 큰 바위로 보였다.

백암산에 오르는 사람 중에는 나처럼 저 바위를 실제로 보고 싶어 오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영봉에 흰 바위가 있어서 "백암산"이라 불리는 이 산에 내가 진작 왔더라면 아호를 "백암(白巖)"이라 지었을 것인데. 서예를 하는 후배가 먼저 쓰고 있어서 그만 두었다.

흰 바위를 뒤로하고 산을 내려왔다. 등에는 옷이 젖도록 땀이 났다. 오다가 백암온천에서 목욕을 하니 몸이 가볍고 기분이 좋았다. 산행 후에 목욕할 수 있는 온천수를 공급하는 백암산이 고마웠다.

(온정출신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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