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독도는 3세기부터 울진의 속도(屬島)
울릉지방 토산물 등 관리 위한 수토정책- 울진 월송포에서 관할


○… 우리나라 사서에 울릉도와 독도가 최초로 기록되는 것은 고구려 동천왕 20년인 246년도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으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려사(高麗史) 지리지 동계(東界) 울진현조(蔚珍縣條)』이다.

이 기록 중 울릉도와 독도와 울진과의 상관관계를 암시하는 기록은 "고려 원종 대에 울진현령 박순(朴淳)이 처자와 노비 및 가산을 배에 싣고 울릉(蔚陵)에 가려하였다"라는 기록이다.

실제 현재 울릉도와 동해안 일대와의 실지거리를 추적하면 강원도 임원항이 137㎞, 죽변항과의 거리는 140㎞로서 임원항이 죽변항 보다는 조금 더 가까우나 해류나 해풍의 경로, 고고학적 유적, 관련 설화 등으로 미루어 역사서에 등장하는 내륙의 출발지는 죽변진(竹邊津)이나 구산진(邱山津)으로 추정하는 것이 관련학계의 통설이다.

특히 조선시대 울릉·독도지역의 수토(搜討)정책의 책임관청이 월송만호(越松萬戶)였다는 점에서 이를 뒷받침한다.

이에앞서 울릉도는 신라 지증왕 13년에 이사부에 의해 징벌된 후 신라에 편입되었다. 당시 울진지방은 신라의 하슬라주에 속해있었으며 울릉도를 울진의 예하에 둔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 한국 고대사의 전개과정에서 울진지방은 우중국(優中國) 또는 우유국(優由國)으로 불렸으며 당시 이 지역의 언어계통은고구려나 부여계통과는 다른 등 문화상징체계의 차별성을 근거로 학계는 기원전 1세기무렵부터 우중국이 설립된 3세기에 이르기까지 울진을 비롯 동해안일대의 주민들이 울릉도로 이주한 것으로 비정된다.

울진지역이 역사적 기록 속에 처음 등장하는 자료는 『삼국사기 지리조 명주(溟州) 울진군조』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울진은 고구려의 우진야현(于珍也縣)에서 3세기 무렵에 신라에 편입된 후 신라 경덕왕대에 "울진"으로 개정된 것으로 확인된다.

울릉도·독도는 신라, 고려 두 왕조를 통해 왕래하면서 꾸준히 방물(토산물)을 헌납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를 근거하는 기록은 "고려 목종대에 우릉성주가 아들을 시켜 토물을 헌납했다는 기록과 고려 충목왕대에 동계의 우릉도 사람이 래조(來朝)하였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우왕 7년인 1381년에 왜구가 울진·평해지방을 침략했다. 또 우왕 8년에 왜구가 평해군을 침략했다.

또 우왕 11년 6월에 왜구가 다시 평해군을 침범하자 강릉도 체찰사 목자안(睦子安)이 이를 격퇴했다. 조선 태종 3년 1403년도에 공도정책을 실시하고 세조 12년인 1466년에 울진포와 월송포를 설치하였으며 강원도 울진현의 속도(屬島)로 편입됐다. 이후 세종대에 울진인인 남호(南顥)가 울진 만호 겸 안무사가 되어 울릉도를 관할했다. 이후 숙종 19년 1693년에 "안용복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조선정부는 울릉도에 대한 수토정책을 강화하고 삼척첨사와 월송만호를 정기적으로 파견해 관리했다. 당시 울릉도 수토를 위해 출발했던 곳이 현재 기성면 구산리에 소재한 대풍헌(待風軒)과 울진의 죽변진으로 확인된다.

최근 독도문제가 국제적인 외교분쟁지로 재 등장하면서 독도영유권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2일 울진군의회(의장 정일순)는 "일본총리 독도망언 강경대응 촉구 결의문"을 채택하고 독도영유권에 대한 정부의 강경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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