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추워졌다.
일하러 나가려던 발을 접고 마루에 앉으니 등이 시리다.
그리도 나의 가을걷이 때 자기도 발 빠르게 가을걷이하던 다람쥐들이 슬 궁금해졌다. 볼에 한 움큼씩 겨울 양식을 물어 나르던 놈들이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잊고 있었다.

산골에서는 저나 나나 서로의 가을걷이를 방해하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관심까지 껐던 모양이다.
언제부터 놈들이 안보이기 시작했는지 기억에 없다. 이쯤 되면 같이 산중생활하는 입장으로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다. 산중에서 겨울을 서로 잘 나고 봄에 만나자는 작별인사 정도는 했어야 옳았는데 말이다.
혹여 날이 조금 풀려 이불을 털더라도 나오면 겨울 인사를 건네야겠다.


시아버님 기일이라 서울에 갔었다.
제사 준비를 하시며 어머님은 자꾸 눈물을 훔치셨다. 왜 안그렇겠는가.
아들 하나 있는 것이 잘 다니던 직장 때려치고 농사짓는다고 어머니 속 다 뒤집어 놓고 산골로 갔는데 기일이라고 왔으니 왜 서럽지 않으셨겠는가.
그리 그리 제사를 마치고 다음날은 일찍 서둘러 간 곳이 있다.
우리농엑스포가 열리는 삼성동 코엑스.
대서양관의 친환경농산물 아트관에 우리 야콘이 전시되었기 때문에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초보농사꾼과 그곳으로 먼저 발길을 돌렸다.
다른 친환경 농산물과 나란히 전시된 우리 야콘을 보니 외국에서 태극기를 본 것만큼이나 목구멍에서 박하향이 났다.

그 오지인 울진 산골에서 이곳까지 와 앉아 있다는 것이 괜시리 아려왔고, 한 해 동안 그 놈들과 가뭄과 장마를 이겨내느라 구슬땀을 흘렸던 일들이 머리 위에 소나기 쏟아지듯 쏟아져 들어와 눈이 화끈거렸다.
그래서일까.

코엑스전시장에 달랑 올라와 앉은 우리 야콘에서 초보농사꾼은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전시장으로 초보농사꾼 친구 부부가 우릴 찾아왔다. 귀농한 친구가 한양에 왔다니 점심을 사준다며 시간을 냈던 것.
그 친구의 사업과는 관계도 없는 농산물을 열심히 보아주는 것으로 그는 농사짓는 친구에 대한 우정의 두께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코엑스에서 나와 점심 먹으러 가는데 자기 차로 가잔다.

   
처음으로 타보는 차다. 일본산 LEXUS(렉서스).
난 현재 스코어, 차에 대해 그다지 욕심이 없다. 그래서인지 그리도 비싸다는 차에 앉았지만 별반 감흥을 못 느낀 것.
점심을 얻어먹고 다시 차를 타고 차 한 잔 마시러 가잔다. 사실 난 이 車든 저 茶든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어여 본가로 가서 CERES(세레스 - 시골에서만 볼 수 있는 거의 농기계에 가까운 차)에 옹기와 수석, 맷돌 등을 싣고 산골로 가야한다는 일에 신경이 모아질 뿐이었다.
서둘러 돌아와 세레스에 온갖 짐을 실었다.
산골에서 요긴하게 쓰일 거라며 어머님이 구해 주신 중고 리어커까지 실으니 꼭 망한 집 이삿짐 같았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빈 공간 없이 많이 싣고 가느냐만이 나의 관심사였다. 이런 이유로 갤로퍼 대신 그 요란 맞은 세레스를 가져온 것이다. 작은 공간마다 항아리 뚜껑을 찔러 넣고 끈으로 묶으니 한 차 완성.

산골로 오며 지나온 '서울시간'을 둘러보았다. 초보농사꾼도 나와 똑같은 필름을 돌리고 있었는지,
"선우 엄마, 난 렉서스나 세레스나 별 차이를 모르겠어. 다만 서울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이 머리를 맑게 하네."한다.
아둔한 사람, 그 차이를 모르다니. 렉서스와 세레스의 차이는 분명 있다. 렉서스를 타고 내렸을 때는 몸에 이상이 없지만, 세레스를 탔다가 내리면 목이 쉰다는 것과 타고 내려서도 계속 타고 있는 듯 털털거림을 몸으로 한동안 느낀다는 것이다.

세레스를 타면 드센 엔진소리 때문에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하다. 큰소리로 말해야, 아니 소리를 고래같이 질러제껴야 대화가 가능하다. 그 대화 소리만 들으면 사생결단을 내고 쌈박질하는 것으로 판단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그 차에서 내리면 막걸리를 들이킨 사람처럼 목이 컬컬하다.

서울을 빠져 나오니 마음이 편하다며 속력을 내는 초보농사꾼. 속력이래봤자 80km면 엔진 터지는 소리가 절정에 이르는 세레스지만... 렉서스를 탄 사람이 불행하다는 논리가 아니고, 세레스를 타고 자연이 기다리는 오두막으로 향하는 산골부부의 가슴에 모과향이 난다는 사실만이 지금 내가 아는 것의 전부일 뿐이다.

귀농 전 같았으면 나의 온 관심사가 아파트 평수이고, 차종이었겠지만 귀농이라는 작대기 하나가 인생의 패를 갈라놓은 것이다. 귀농은 소풍길 위에 있는 내게 무엇으로 다가오는가.


산골살이는 어느 것 하나 진부한 것이 없다.
남들은 모두 다가 낡아 보이고 쓸모없어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구멍 난 소쿠리가 그저 궁상맞은 물건쯤으로만 보인다면 당신의 마음에는 이미 고향이 없다.
고향이 있는 사람은 그것들을 보고 낡았다 하지 않는다.
가슴에 손을 대어 보라. 그대 작은 가슴에 고향이 숨쉬고 있는지....

산골 오두막에서 배동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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