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24일 비가 온다.
사람이 있는 마음을 어떤 이유에서 둘러 먹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내 마음을 내 맘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내 마음 움직이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다.
산골에서도 간혹 화가 나는 경우가 있다. 도시 같았으면 친한 사람 만나 차 한 잔 앞에 놓고 침튀겨가며 언성을 높였겠지만 산골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화가 난 상태에서 밭에 나가 일하는 것을 자제하고 있다. 그것은 그 화가 작물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식물에도 마음이 있다. 예전에 읽은 `식물의 신비세계'(정확한 제목인지 모르겠지만)라는 책을 보기 전에도 그 믿음은 있었다. 밭에 가면 말이 많아진다. 시들 시들한 놈에게는 어디 아프냐고 묻기도 하고, 큰 고추를 달고 있는 놈에게는 애먹었다고 위로도 해준다. 서울갈 때는 밭에다 대고 서울다녀온다고 말하고 간다. 작년에도 초보농사꾼과 열심히 작물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올해는 그 애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려고 앰프 등을 사들였는데 초보농사꾼의 손이 닿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시간탓인지, 기계탓인지는 초보농사꾼만이 아는 일이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밭에서 화를 삭히는 일은 가급적 안한다. 오늘도 비가 소강상태일 때 밭에 잠시 가려다 오두막 주위의 풀을 깎았다. 낫으로 슥슥 깎다보면 시야가 환해지면서 어느새 화는 잡초와 함께 베어나가고 마음에는 소리없는 시냇물이 흐른다.
산골에서도 제 살 궁리는 다 하고 산다. 그리 해 보니 작물에게도 화가 안 미치고 이웃도 끌어안을 수 있어 좋고 내 자신도 맑힐 수 있어 더욱 더 좋다.
덕분에 마당 돌축대를 쌓아놓은 곳이 말끔해졌다. 비바람에 고추가 조금 쓰러졌다고 하던데 내일은 한 번 올라가서 일으켜 세워 줘야겠다. 바람에 잘 견디라는 말도 잊지 않고 해주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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